공용어만 14개인 레슬링의 성지 다게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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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리 2024 올림픽 레슬링 남자 자유형에 걸린 6개 금메달 가운데 3개, 또 24개 전체 메달 가운데 6개는 인구 300만의 작은 나라에서 배출한 선수들이 가져갔다. 전체 메달 수에서 레슬링 강국인 이란(4개), 미국(3개), 일본(3개)을 앞지른 이 나라는 독립국도 아니고 바로 러시아 연방에 속한 다게스탄 공화국이다.

다게스탄은 러시아 연방에 속한 북카프카스(현행 표기 규정으로는 ‘캅카스’) 지역 동부에 있는 공화국으로 주민 30.5%에 달하는 아바르인을 비롯하여 다르기인, 쿠미크인, 레즈기인 등 여러 민족이 산다(러시아계 주민은 3.3%뿐이다). 공용어가 14개일 정도이다. 튀르크어로 ‘산’을 뜻하는 dağ에 ‘땅’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식 접미사 -stan이 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이 산지이고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에 면하고 있다.

다게스탄 출신 선수들은 예전에 러시아 대표로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세계 레슬링 연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대한 제재로 러시아를 퇴출시켰다. 러시아는 이미 국가 주도 도핑 프로그램 때문에 국가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는데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이번 파리 올림픽에는 러시아 군과 관계가 없고 러시아의 군사 활동을 지지하지 않는 러시아 선수들만 중립 개인 선수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다게스탄 출신 올림픽 레슬링 2관왕인 압둘라시트 사둘라예프(Абдулрашид Садулаев/Abdulrashid Sadulayev)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올림픽 예선 대회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이하 따로 언급하지 않는 한 다게스탄 선수 이름의 원어는 러시아어 형태로 제시한다).

역시 다게스탄 출신 레슬링 선수인 샤밀 마메도프(Шамиль Мамедов/Shamil’ Mamedov)는 중립 개인 선수 자격을 충족하여 올림픽에 초청되어 수락했다가 결국 출전권을 반납해야 했다. 러시아 레슬링 연맹이 러시아 선수들이 중립 개인 선수로도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대신 여러가지 이유로 국적을 바꾸어 올림픽에 참가하여 메달까지 딴 다게스탄 출신 레슬링 선수들을 파리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바레인 대표로 자유형 97kg에서 금메달을 딴 아바르계 선수 아흐메트 타주디노프(Ахмед Тажудинов/Akhmed Tazhudinov)는 러시아의 두꺼운 선수층 때문에 그동안 각종 연령층을 포함하여 러시아 대표팀에 한 번도 들지 못하다가 2022년에 바레인으로 국적을 바꾸어 이번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우즈베키스탄 대표로 자유형 74kg에서 금메달을 딴 체첸계 선수 라잠베크 자말로프(Разамбек Жамалов/Razambek Zhamalov)는 부상으로 2년 간 선수 활동을 중단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국내 무대 경쟁이 덜 치열한 나라로 옮겼다고 한다.

이처럼 러시아 내의 치열한 경쟁을 피하고 다른 나라에서 받는 지원과 금전적인 보상을 목적으로 국적을 바꾸는 일을 그러지 않아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러시아가 국제 스포츠계에서 퇴출되기까지 하자 최근 몇 년 사이 그동안 러시아 대표로 활동했던 다게스탄 선수들마저 국적을 바꾸는 일이 속출했다. 아바르계인 마고메트 라마자노프(Магомед Рамазанов/Magomed Ramazanov)는 불가리아 대표로 자유형 86kg에서 금메달을 땄고 레즈기계인 다우렌 쿠루글리예프(Даурен Куруглиев Dauren Kurugliyev)는 그리스 대표로 같은 체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역시 아바르계인 마고메트한 고메도프(Магомедхан Магомедов/Magomedkhan Magomedov, 현행 규정에 따르면 ‘마고멧한 마고메도프’)는 아제르바이잔 대표로 출전하여 타주디노프가 우승한 자유형 97kg에서 동메달을 땄다.

또 알바니아 대표로 나온 체첸계인 이슬람 두다예프(Ислам Дудаев/Islam Dudayev)는 자유형 65kg에서 동메달을 땄다. 파리 2024 올림픽 이전에 알바니아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두다예프가 동메달을 따기 하루 앞서 자유형 74kg에서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땄는데 주인공은 러시아 연방에 속한 북오세트 공화국 출신의 오세트계인 체르멘 발리예프(Чермен Валиев/Chermen Valiyev)였다. 북오세트 역시 다게스탄처럼 카프카스 지역에 속한다.

레슬링은 카프카스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카프카스 서부, 북오세트 남쪽에 있는 독립국 게오르기아도 자유형 125kg 금메달리스트 게노 페트리아슈빌리(გენო პეტრიაშვილი Geno Pʼetʼriashvili), 자유형 97kg 은메달리스트 기비 마차라슈빌리(გივი მაჭარაშვილი Givi Machʼarashvili) 등을 배출하였다. 자유형 125kg 준결승에서 페트리아슈빌리에게 패한 후 동메달을 딴 아제르바이잔 선수도 2018년까지 게오르기아 대표였던 게오르기아 출신의 기오르기 메슈빌디슈빌리(გიორგი მეშვილდიშვილი Giorgi Meshvildishvili)이다.

다게스탄 남쪽으로 있는 독립국 아제르바이잔도 나름 레슬링 강국인데 이번에 자유형 메달 둘은 이웃 나라 출신 귀화 선수들이 땄다. 하지만 그레코로만형으로 지평을 넓히면 67kg 동메달은 아제르바이잔에서 태어난 해스래트 재패로프(Həsrət Cəfərov)가 땄다. 게오르기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있는 독립국 아르메니아에서도 그레코로만형 97kg 은메달리스트 아르투르 알렉사니안(Արթուր Ալեքսանյան Artʿur Alekʿsanyan)과 그레코로만형 77kg 동메달리스트 말하스 아모얀(Մալխաս Ամոյան Malkhas Amoyan)을 배출했다.

다게스탄은 러시아 연방에 속한 체첸 공화국에 접해있다. 체첸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러시아와 두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번에 그레코로만형 87kg에서 동메달을 딴 덴마크의 투르팔 비술타노우(Turpal Bisultanov)는 체첸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에 전쟁을 피해 덴마크에 이주했다. 러시아어 이름은 투르팔 비술타노프(Турпал Бисултанов/Turpal Bisultanov)이다.

카프카스 지역 전역에서 레슬링이 인기가 있지만 특히 다게스탄에서 정상급의 선수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이웃 체첸에서 일어난 전쟁이 다게스탄에까지 불똥이 튄 적이 있어 다민족 사회인 다게스탄에서는 민족 갈등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하다. 그 가운데 젊은이들은 폭력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값비싼 준비물이 필요 없는 레슬링에 몰두하는 것이라고들 흔히 분석한다. 물론 소련 시절의 레슬링 훈련 시스템과 노하우가 건재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소련은 20세기 후반에 올림픽 레슬링의 최강자가 되었는데 당시에도 다게스탄을 비롯하여 게오르기아, 아르메니아, 북오세트 등 카프카스 지역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련 농구팀은 리투아니아 선수들이 주축이었고 소련 축구팀은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주축이었다면 소련 레슬링은 카프카스 출신 선수들이 이끌었다. 후에 소련이 해체되고 게오르기아, 아르메니아 등이 독립하면서 러시아 연방에 남은 다게스탄이 러시아 레슬링을 이끌게 된 것이다.

다게스탄에서 쓰이는 14개 공용어 가운데 아바르어와 다르기어, 레즈기어, 라크어, 타바사란어, 루툴어, 아굴어, 차후르어, 체첸어 등은 동북 카프카스 어족에 속하고 쿠미크어와 노가이어, 아제르바이잔어 등은 튀르크 어족에 속하며 타트어는 인도·유럽 어족 이란 어파에 속한다. 1930년대까지 서로 다른 언어를 모어로 쓰는 다게스탄 주민들의 교통어는 튀르크 어족에 속하는 쿠미크어였다. 오늘날에는 러시아어가 교통어로 쓰인다.

다게스탄은 인구 300만에 지나지 않는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이고 공용어의 수가 많은만큼 각 언어의 사용자 수도 적으니 이들에 대한 정보는 찾기 힘들다. 다게스탄 출신 선수들의 러시아어 이름은 찾기 쉽지만 아바르어나 레즈기어, 체첸어 형태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러시아어 형태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게스탄 인명에 흔히 나타나는 Магомед(Magomed) ‘마고메트’는 흔한 아랍어 남자 이름 محمد Muḥammad ‘무함마드’의 예스러운 러시아어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요즘은 이 이름을 러시아어로 보통 Мухаммед(Mukhammed) ‘무함메트’로 쓰지만 20세기 이전에는 Магомед(Magomed)나 특히 Магомет(Magomet)로 흔히 썼다. 예전의 프랑스어 형태인 Mahomet [maɔmɛ] ‘마오메’를 차용한 형태이다. 영어에서도 18세기까지는 Mahomet가 가장 흔한 철자였다가 Mohammed로 대체되었고 지금은 문어체 아랍어에 가까운 Muhammad가 선호된다.

러시아어 г(g)는 오늘날 유성 연구개 폐쇄음 [ɡ]로 발음하는 것이 표준이지만 남부 방언에서는 마찰음 [ɣ]로 발음되고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어에서처럼 [ɦ]로 발음되기도 한다. 동방 정교회의 전례에 쓰이는 언어인 교회 슬라브어의 러시아식 발음에서는 г(g)를 전통적으로 [ɣ]로 발음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라틴어나 영어, 독일어 등에서 온 차용어에서 원어의 [h]는 г(g)로 썼다. 프랑스어 Mahomet가 러시아어 Magomet로 둔갑한 것은 이 때문이다. 더 최근의 형태인 Mukhammed에서 볼 수 있듯이 요즘은 [h]를 х(kh)로 흉내낸다.

그렇다면 다게스탄 현지 언어에서 쓰는 형태는 정말 ‘마고메트’에 가까울까? 그것은 아닌 듯하다. 아바르어로 아랍어 ‘무함마드’에 해당하는 이름은 МухӀамад(Muẖamad) ‘무하마드’이다. 아바르어식 키릴 문자에서 хӀ(ẖ)는 무성 후두개 마찰음 [ʜ]를 나타낸다.

레즈기어로는 Мугьаммад(Muhammad) ‘무함마드’라고 쓴다. 레즈기어식 키릴 문자에서 гь(h)는 [h]를 나타낸다. 체첸어로는 Мохьмад(Moẋmad) ‘모흐마드’로 쓴다. 체첸어식 키릴 문자에서 хь(ẋ)는 무성 인두 마찰음 [ħ]를 나타낸다.

같은 이름이 아제르바이잔어로는 Məhəmməd ‘매햄매드’이다. 아제르바이잔으로 국적을 바꾼 마고메트한 마고메도프(Магомедхан Магомедов/Magomedkhan Magomedov)는 아제르바이잔어로 Məhəmmədxan Məhəmmədov ‘매햄매트한 매햄매도프’라고 부른다. 아제르바이잔어의 ə는 [æ]를 나타내기 때문에 여기서 ‘애’로 적었지만 한국어 화자가 듣기에 ‘아’에 더 가깝기도 하니 ‘마함마드’, ‘마함마트한 마함마도프’가 더 나은 표기일 수도 있겠다.

이처럼 다게스탄에서 쓰는 여러 언어 가운데서 ‘마고메트’에 가까운 형태의 이름을 쓰는 예는 찾기 힘들다. 그러니 다언어 사회인 다게스탄에서 아랍어 ‘무함마드’에 해당하는 이름은 그 인물의 모어에서 쓰는 발음과 차이가 나더라도 교통어인 러시아어를 쓸 때는 편의상 예스러운 러시아어 형태 ‘마고메트’로 대체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랍어 أحمد ʾAḥmad ‘아흐마드’에서 온 이름도 마찬가지 이유로 러시아어 형태 Ахмед(Akhmed) ‘아흐메트’로 대체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바르어로 이 이름은 АхӀмад(Aẖmad) ‘아흐마드’이다.

그런데 아흐메트 타주디노프는 올림픽에 참가하려고 바레인 국적을 얻었으니 바레인의 공용어인 아랍어로는 أحمد تاج الدين ʾAḥmad Tāju d-Dīn ‘아흐마드 타주딘’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의 성씨인 ‘타주디노프’는 애초에 ‘믿음의 왕관’을 뜻하는 아랍어 남자 이름 Tāju d-Dīn ‘타주딘’에서 들여온 이름에 러시아어식 접미사 -ов(-ov) ‘오프’를 붙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다게스탄 레슬링 선수를 영입한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러시아어 형태를 그대로 쓴다. 불가리아에서는 마고메트 라마자노프를 러시아어와 키릴 문자 철자도 똑같이 불가리아어로 Магомед Рамазанов(Magomed Ramazanov) ‘마고메트 라마자노프’라고 부른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라잠베크 자말로프의 러시아어 키릴 문자 철자를 그대로 쓰는데 Разамбек Жамалов가 우즈베크어 로마자 철자로는 Razambek Jamalov가 된다. 우즈베크어는 소련 시절 키릴 문자로 쓰다가 독립 이후 공식적으로 로마자로 전환했지만 아직도 키릴 문자로 흔히 쓰며 둘은 상호 호환이 가능한데 키릴 문자 ж는 로마자 j에 대응된다. 예전에는 국제 대회에 참가할 때 러시아어식으로 성씨를 로마자로 Zhamalov로 표기했는데 우즈베키스탄 대표로 참가한 이번 올림픽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Jamalov로 표기하는 것이 눈에 띈다.

알바니아에서는 이슬람 두다예프와 체르멘 발리예프를 이미 국제 대회에서 쓰던 통용 로마자 표기에 따라 Islam Dudaev, Chermen Valiev로 쓴다. 대신 알바니아어로는 ‘이슬람 두다에브’, ‘체르멘 발리에브’로 발음하게 된다. 그리스에서는 다우렌 쿠루글리예프를 그리스어로 Νταουρέν Κουρουγκλίεφ(Ntaourén Kourougklíef) ‘다우렌 쿠루글리에프’로 표기한다. 현대 그리스어로는 유성 폐쇄음 [d], [ɡ]를 각각 ντ(nt), γκ(gk)로 나타내는 것이 특이하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들 음을 나타내던 δ, γ는 현대 그리스어에서 각각 마찰음 [ð], [ɣ]로 음가가 변했고 대신 원래 [nt], [ŋk]를 나타내던 철자 조합이 [(n)d], [(ŋ)ɡ]로 발음이 변했다. 이 방식으로는 폐쇄음 앞에 비음이 오는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Kourougklíef는 ‘쿠룽글리에프’로 쓸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원어에 가깝게 ‘쿠루글리에프’로 썼다.

좋든 싫든 러시아어는 이처럼 러시아 연방에서 쓰이는 여러 언어와 다른 언어의 매개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의 러시아어 표기 규정 개선이 시급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카프카스’의 표기에 대한 예전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러시아어를 통해 접하는 러시아의 여러 소수 언어의 표기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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