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럭비에서 오세아니아어 이름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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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 올림픽의 7인제 럭비 일정은 끝난지 일주일이 넘었으니 글이 늦은 감이 있지만 언어에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 올림픽 메달을 딴 선수 이름의 한글 표기를 논한다면 럭비를 빼놓을 수 없다.

럭비는 오세아니아 여러 나라에서 크게 인기가 있어서 15인제 럭비에서는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가 같은 남반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부동의 강자이다. 그런데 2016 리우 올림픽 때부터 종목으로 채택된 7인제 럭비에서는 훨씬 더 작은 섬나라 피지가 전통적인 강자이다. 남자 럭비에서는 2016, 2020 올림픽에서 전승으로 2연속 금메달을 땄고 2020 올림픽에서는 여자 럭비에서도 동메달을 땄다.

2024 올림픽에서도 피지는 남자 축구에서 전승으로 결승전에 올랐다. 하지만 15인제 최고 스타 앙투안 뒤퐁(Antoine Dupont [ɑ̃twan dypɔ̃])을 영입하면서까지 올림픽을 준비한 개최국 프랑스가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금메달을 따내면서 올림픽에서 피지 남자 럭비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최초의 팀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쪽, 뉴질랜드의 북쪽에 있는 멜라네시아의 섬나라인 피지에서는 영어와 피지어, 피지 힌디어가 모두 공용어로 쓰인다. 2016년 통계에 의하면 피지 주민의 56.8%는 피지계 즉 피지 원주민에 속하고 37.5%는 인도계이다. 그런데 피지 대표로 뛰는 럭비 선수들은 모두 피지어식 이름을 쓰는 피지계이다.

남도 어족(오스트로네시아 어족)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 오세아니아 어군에 속하는 여러 언어 가운데 하나인 피지어는 로마자를 쓰고 철자와 발음의 대응이 상당히 규칙적인데 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c는 영어 they의 th와 같은 [ð]를 나타낸다. 이는 한글로 ‘ㄷ’으로 적는 것이 좋겠다.

또 g는 받침 ‘ㅇ’과 같은 [ŋ]을 나타내며 q는 [ᵑɡ] 즉 비음이 선행하는 [ɡ]를 나타낸다. b, d도 비음이 선행하여 [ᵐb, ⁿd]로 발음된다. 즉 철자 p, t, k로 쓰는 [p, t, k]에 해당하는 유성음 짝 b, d, q는 단순 유성 폐쇄음인 [b, d, ɡ]가 아니라 비음이 선행되는 [ᵐb, ⁿd, ᵑɡ]이다.

하지만 Milner에 의하면 어두에서는 선행 비음이 듣기 힘들고 Schütz에 의하면 모음 사이에서와 비교해서 그 길이가 짧다.

Milner, George. (1972). Fijian grammar. Government Press.
Schütz, Albert. (2014). Fijian reference grammar. PacificVoices

인터넷에서 Bainimarama, danisi 등의 피지어 발음을 관찰해봐도 어두에서는 선행 비음이 잘 들리지 않는다. https://forvo.com/word/bainimarama/#fj https://forvo.com/word/danisi/#fj

하지만 Vakaraubuka, vasaqa 등 모음 사이에 오는 유성 폐쇄음에서는 선행 비음이 분명히 들린다. https://forvo.com/word/vakaraubuka/#fj https://forvo.com/word/vasaqa/#fj

그러니 b, d, q는 어두에서는 그냥 ‘ㅂ, ㄷ, ㄱ’으로 적고 어중 모음 사이에서는 ‘ㅁㅂ, ㄴㄷ, ㅇㄱ’으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어두에서는 Bainimarama ‘바이니마라마’, danisi ‘다니시’로 적되 어중 모음 사이에서는 Vakaraubuka ‘바카라움부카’, vasaqa ‘바상가’로 적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은메달을 딴 피지 남자 럭비팀 선수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다.

Iosefo Baleiwairiki ‘이오세포 발레이와이리키’
Ponepate Loganimasi ‘포네파테 롱아니마시’
Jeremaia Matana ‘제레마이아 마타나’
Sevuloni Mocenacagi ‘세불로니 모데나당이’
Waisea Nacuqu ‘와이세아 나둥구’
Joji Nasova ‘조지 나소바’
Josaia Raisuqe ‘조사이아 라이숭게’
Kaminieli Rasaku ‘카미니엘리 라사쿠’
Selesitino Ravutaumada ‘ 셀레시티노 라부타우마다’
Filipe Sauturaga ‘필리페 사우투랑아’
Joseva Talacolo ‘조세바 탈라돌로’
Iowane Teba ‘이오와네 템바’
Jerry Tuwai ‘제리 투와이’
Terio Tamani Veilawa ‘테리오 타마니 베일라와’

기독교도가 다수인 피지계 주민들은 이른바 기독교식 이름과 전통 피지어식 이름을 같이 쓰는 경우가 많다. Iosefo는 히브리어 יוֹסֵף Yôsēp̄ ‘요세프’, 영어 Joseph [ˈʤoʊ̯z⟮s⟯.ᵻf] ‘조지프’에 해당하는 피지어식 표기이다. 전통적으로는 성씨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식 이름 뒤에 쓰이는 전통 피지어식 이름이 반드시 성씨인 것은 아니다.

피지어식 표기와 원어식 표기가 혼용되기도 한다. 위의 Selesitino Ravutaumada는 Selestino Ravutaumada로도 흔히 쓴다. 아마 라틴어 Caelestinus ‘카일레스티누스’, 영어 Celestine [ˈsɛl.ə⟮ᵻ⟯.stiːn] ‘셀러스틴’에 해당하는 이름이 아닐까 하는데 자음군을 허용하지 않는 피지어의 특징 때문에 Selestino ‘셀레스티노’에서 i를 삽입하여 Selesitino ‘셀레시티노’가 된 것 같다.

그런데 피지어 외에도 오세아니아 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올림픽 럭비 선수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여자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뉴질랜드 대표팀은 선수 대다수가 폴리네시아 혈통이다.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계가 대부분이고 사모아계 선수도 있다. 마오리어와 사모아어 역시 오세아니아 어군, 그 가운데도 폴리네시아 어군에 속한다.

마오리어는 영어와 함께 뉴질랜드의 공용어이다.

마오리계 선수 가운데 Portia Woodman-Wickliffe [ˈpɔːɹʃ.ə ˈwʊd.mən ˈwɪk.lɪf] ‘포샤 우드먼위클리프'(혼인 전에는 그냥 Portia Woodman ‘포샤 우드먼’)처럼 완전히 영어식 이름과 성씨를 쓰는 경우도 있고 Manaia Nuku ‘마나이아 누쿠’처럼 완전히 마오리어식 이름과 성씨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영어와 마오리어를 혼합한다.

2016 올림픽에서 뉴질랜드 여자 럭비팀 주장을 맡았던 마오리계 선수 세라 고스(Sarah Goss [ˈsɛə̯ɹ.ə ˈɡɒˑs] ‘세라 고스’는 2019년 혼인한 뒤 역시 마오리계인 남편 성을 따서 세라 히리니(Sarah Hirini)라는 이름을 쓴다. 그는 2020 올림픽에서도 주장을 맡았고 이번에는 리시 포우리레인(Risi Pouri-Lane)과 함께 공동 주장을 맡았으며 개회식에서 뉴질랜드 기수를 맡기도 했다.

다음 동영상에서 그를 인터뷰하는 뉴질랜드인이 Sarah는 영어식으로 발음하고 Hirini는 마오리어 발음을 흉내내어 r를 탄음 [ɾ]로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https://youtu.be/xGX_EA4bwFY?si=8dcmbu7VQjyozGec&t=118
마오리어식 이름을 영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따질 필요가 없이 마오리어 형태를 그대로 한글로 표기하면 그만이다. 마오리어도 철자와 발음 대응이 규칙적이어서 한글 표기를 정하기가 쉽다. 전통적으로 [ɸ], 요즘은 [f]로 발음되는 wh의 표기처럼 까다로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올림픽 참가 선수 이름 가운데는 이 철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Risi Pouri-Lane도 Lane만 영어 발음 [ˈleɪ̯n]에 따라 ‘레인’으로 표기하고 나머지 부분은 마오리어로 취급하여 ‘리시 포우리레인’으로 적으면 그만이다. Pouri가 영어로 어떻게 발음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한편 Alena Saili와 Theresa Setefano는 사모아계 선수들이니 Saili, Setefano는 사모아어로 취급하여 ‘사일리’, ‘세테파노’로 적을 수 있다. Setefano를 굳이 영어 발음대로 적으려 하면 ‘세터파노’, ‘세터패노’, ‘세티파노’ 등 짐작할 수 있는 표기가 많지만 영어가 뉴질랜드의 유일한 공용어도 아니니 영어식 한글 표기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영어식 이름인 Alena와 Theresa의 표기가 까다롭다. Alena의 본인 발음은 [ə.ˈliːn.ə] ‘얼리나’로 관찰된다.

하지만 동메달을 딴 미국 여자 럭비팀의 Alena Olsen은 [ə.ˈleɪ̯n.ə ˈoʊ̯ls.(ə)n] ‘얼레나 올슨’으로 발음한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후자는 ‘얼레이나’로 적어야 하지만 차용어에서 원어의 [e]를 나타내는 철자 e가 [eɪ̯]로 발음되는 경우 그냥 ‘에’로 적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올림픽 공식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Alena Saili의 발음을 들으면 Alena도 영어식이 아닌 사모아식으로 ‘알레나’로 발음한다. 이것도 본인 발음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 선수 이름의 한글 표기는 ‘알레나’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Theresa는 뉴질랜드에서 보통 [tə.ˈɹiːz.ə] ‘터리자’로 발음되지만 [tə.ˈɹiːs.ə] ‘터리사’도 가능하다(미국 발음에서는 [z] 대신 [s]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독일어 등 외국어 발음을 흉내내어 [tə.ˈɹeɪ̯z.ə] ‘터레자’로 발음할 수도 있다. 영국식으로는 첫 모음을 [ᵻ], 즉 [ɪ] 또는 [ə]로 발음될 수 있는 약화된 모음으로 보고 ‘티리자’, ‘티리사’ 등의 표기를 쓸 수도 있다.

또 롱맨 발음 사전, 케임브리지 영어 발음 사전에서는 첫 모음을 [ə] 또는 [ᵻ]로만 제시하지만 철자가 약간 다른 Teresa는 첫 모음이 [ɛ]인 [tɛ.ˈɹiːz.ə] ‘테리자’, [tɛ.ˈɹiːs.ə] ‘테리사’ 등도 가능 발음으로 제시한다.

전 영국 총리 Theresa May를 ‘테리사 메이’로 심의한 전례가 있다. Theresa도 Teresa처럼 첫 모음이 [ɛ]로 발음되는 것으로 보고 [z]와 [s]가 둘 다 가능한 s는 [s]인 것처럼 표기를 통일한 결과이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영어 발음에 따라 한글 표기를 정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할 수 있다. 미국 태생의 스웨덴 장대높이뛰기 선수 아르만드 두플란티스/아만드 듀플랜티스(Armand Duplantis)에 대한 지난 글에서도 한 얘기이지만 영어권 이름처럼 보여도 다른 언어 이름으로 취급하여 한글 표기를 정하는 것이 더 깔끔한 예가 많다.

뉴질랜드는 흔히 영국, 아일랜드 등 백인들이 정착한 나라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주민 17.8%가 마오리계이고 8.9%가 기타 태평양 섬 출신이다. 아시아계 주민도 17.3%이다. 이번 대회에 Tyla King [ˈtaɪ̯l.ə ˈkɪŋ] ‘타일라 킹’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뉴질랜드 여자 럭비 선수는 혼인 전에 Tyla Nathan-Wong [ˈtaɪ̯l.ə ˈneɪ̯θ.(ə)n ˈwɒˑŋ] ‘타일라 네이선웡’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던 중국·유럽·마오리계 출신이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중국 광둥성 출신 이민자들에게서 뉴질랜드에서 태어났으며 Wong ‘웡’으로 발음되는 광둥어 성씨는 黃, 王 등 여럿이 있는데 어느 한자를 쓰는지는 찾지 못했다.

일일이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나머지 뉴질랜드 여자 럭비 선수 이름의 표기는 현재 작업 중인 2024 파리 올림픽 입상 선수 한글 표기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올림픽 여자 럭비 준결승전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잇따라 충격의 패배를 당하며 메달을 따는데 실패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선수 가운데도 오세아니아식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얼리시아 레파우파카오실레아(Alysia Lefau-Fakaosilea)는 사모아계와 통가계로 뉴질랜드에서 태어났으나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로 뽑힌 경우이다. Alysia [ə.ˈlɪs.i‿ə] ‘얼리시아’는 영어, Lefau ‘레파우’는 사모아어, Fakaosilea ‘파카오실레아’는 통가어 이름으로 보인다(통가어도 마오리어와 사모아어처럼 폴리네시아 어군에 속한다).

오세아니아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남자 서핑에서 금메달을 딴 프랑스의 카울리 바스트(Kauli Vaast [kauli vast])의 이름도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그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타히티섬 출신이고 타히티어 역시 폴리네시아 어군에 속하지만 그의 이름은 타히티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Vaast는 프랑스어식 성씨이고 Kauli는 하와이어에서 나온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이고 그의 어머니는 역시 태평양에 있는 프랑스령인 누벨칼레도니의 원주민인 카나크 출신이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만났기 때문에 아들에게 하와이어로 ‘바다에 나가는 이’를 뜻하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그런 말이 하와이어에 있는지 사전을 찾아보니 ‘멋을 부리다’를 뜻하는 kaulī, ‘슬쩍 쉭쉭 소리를 내며 움직이다’를 뜻하는 kaʻulī가 있지만 설명과 같은 뜻은 찾지 못해서 올바른 설명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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