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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남부 해안에 ‘나트랑(Nha Trang)’이라고 흔히 부르는 휴양 도시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규범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냐짱’이다. 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나트랑’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인지 2004년 베트남어 표기 규정이 도입된 지 20년 가까이 지나도록 ‘냐짱’보다 비표준 ‘나트랑’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며 한국에서 그곳에 취항하는 항공사마다 ‘나트랑’이라고 부른다.
옛 신문 기사를 검색하면 1954년부터 ‘나트랑’이란 표기가 나타나며 베트남 전쟁 중에는 중요한 공군 기지가 있었기 때문에 자주 언급되었다. 다른 표기로 나타나는 것은 1993년 《조선일보》 기사에 실린 ‘나짱(한국사람에게는 「나트랑」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이 처음으로 보인다. 이처럼 1990년대 기사에서는 ‘나짱’이라는 표기를 극소수 발견할 수 있는데 당시는 베트남어가 외래어 표기법에 추가되기 전이었지만 좀 더 현지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다만 첫 음절을 ‘냐’ 대신 ‘나’로 썼으니 현 규범 표기와는 살짝 다르다. 원 발음을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두음 법칙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어에서 어두 ‘냐’를 꺼리기 때문에 ‘나’로 대체한 것일 수 있다. 한편 1998년 《매일경제》 기사에만 나오는 ‘나탕’이라는 표기도 보인다.
그러면 Nha Trang은 베트남어로 과연 ‘냐짱’과 같이 발음될까?
베트남어 발음은 지역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난다. 흔히 베트남어는 크게 북부 방언, 중부 방언, 남부 방언으로 나눈다. 학자들이 쓰는 엄밀한 방언학적 구분은 이와 꼭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일반인은 대체로 이와 같은 세 가지 방언권이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베트남의 수도는 북쪽의 하노이(Hà Nội)이고 최대 도시는 사이공(Saigon)이라는 전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남쪽의 호찌민(Hồ Chí Minh)시이다. 또 1802년부터 1945년까지는 중부의 후에(Huế)가 베트남의 수도였다. 이들 세 곳의 말씨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니 각각 북부, 남부, 중부 방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각 방언도 내부적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이지만 편의상 여기서 북부 방언이나 발음이라고 하면 하노이의 것을, 중부는 후에의 것을, 남부는 호찌민시의 것을 대표로 삼기로 한다.
지역에 따른 발음 차이는 외부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철자 d 또는 gi로 나타내는 첫소리는 북부에서 보통 [z]로 발음하지만 중부와 남부에서는 [j]로 발음한다(중부에서도 방언에 따라 d를 [z]로 발음하고 gi는 [j]로 발음할 수 있다). 그러니 남부에서 질문에 답할 때 ‘예’를 뜻하는 dạ는 남부에서 [ja̬ː] ‘야’, 중부에서 [jâːˀ] ‘야’로 발음하지만 북부에서는 [zâːˀ] ‘자’로 발음한다(북부에서는 질문에 답하는 ‘예’로 vâng [və̄ŋ] ‘벙’을 더 쓴다). ‘바람’을 뜻하는 gió는 북부에서 [zɔ̌ː] ‘조’로 발음하지만 중부와 남부에서 [jɔ̌ː] ‘요’로 발음한다.
문자 언어는 17세기 중세 베트남어를 바탕으로 마련한 로마자 철자법인 쯔꾸옥응으(Chữ Quốc Ngữ, 𡨸國語)를 쓰는데 그 후 일어난 발음 변화 때문에 방언마다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조금 복잡하다. 방언에 관계 없이 공통된 표준 문자 언어를 쓰지만 간혹 특정 방언 어휘를 현지 발음에 따라 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중부와 남부에서 건배할 때 쓰는 말인 vô는 원래 북부에서 vào [vàːu̯] ‘바오’가 단순모음화한 vô [vō] ‘보’에서 나왔지만 첫소리 v가 [j]로 발음되기도 하는 변화로 인해 남부에서는 일반적으로 [jōu̯] ‘요(우)’로 발음하며 이에 따라 dô라는 철자로도 쓴다. 이는 북부에도 전해졌는데 북부식으로 dô는 [zōː] ‘조’로 발음하므로 zô나 dzô라는 철자로 흔히 나타낸다. 베트남어 표준 철자법에는 z가 나타나지 않으니 여기서는 일부러 방언 발음을 흉내내려 쓴 것이다.
이쯤 되면 서로 다른 말씨를 쓰는 베트남어 화자들이 말이 제대로 통할지 궁금해질 수 있겠다. 실제로 베트남 중북부의 내륙 산지 등 일부 지역 방언은 어휘·문법의 차이 때문에 다른 방언 화자들이 알아듣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대도시 및 해안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베트남어 화자들은 서로 상당히 다른 발음을 쓰더라도 의사 소통에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동안 진행된 베트남 내부 인구 이동 외에 방송의 영향도 큰 것 같다.
예전에는 주요 방송사가 하노이에 소재해 있어 방송에서 주로 북부 발음만 들을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방송에서 북부 발음과 남부 발음을 둘 다 흔히 들을 수 있다. 대신 중부 발음은 아직 듣기 어렵다. 2014년에는 아인프엉(Anh Phương)이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베트남 텔레비전(VTV) 뉴스를 진행하는 최초의 후에 말씨를 쓰는 아나운서로 발탁되었지만 그의 발음에 대한 시청자 항의 끝에 1년만에 하차했다. 그런데 이런 논란은 순전히 중부 발음을 다른 방언 화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출신 지역에 대한 편견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지역에 따른 발음 차이를 무시하고 베트남어는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해서 한글로 표기한다. 첫소리 d와 gi의 경우 북부 발음 [z]를 기준으로 ‘ㅈ’으로 적는다. 그러니 dạ는 ‘자’, gió는 ‘조’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규범 표기이다. 참고로 đ [ɗ]는 ‘ㄷ’으로 적으므로 단순화된 베트남어 철자에 d가 나타난다고 해서 모두 ‘ㅈ’으로 적는 것은 아니다. 중부 도시 Đà Nẵng은 ‘다낭’으로 적는다.
Nha Trang은 하노이식 북부 발음으로 [ɲāː.ʨāːŋ] ‘냐짱’으로 발음된다. 그러니 여기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규범 표기인 ‘냐짱’은 북부 발음을 충실히 나타낸다(그렇다고 해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가 언제나 북부 발음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냐짱은 남부 방언권에 속하므로 호찌민시식 남부 발음을 기준으로 하면 [ɲāː.ʈāːŋ] ‘냐땅’에 가깝다. 한 동영상에서 남부 출신 화자가 쓰는 발음을 들을 수 있다.
베트남어 철자 tr는 전통적으로 무성 권설 폐쇄음 [ʈ]로 발음되었으며 남부에서는 이 발음이 아직 흔하다. 그런데 방언에 따라 이것이 파찰음화하여 [ʦ̢]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ch로 적는 첫소리도 전통적으로는 무성 경구개 폐쇄음 [c]로 발음되었지만 [ʨ]로 파찰음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노이식 북부 발음에서는 tr가 ch와 발음이 합쳐져 둘 다 [ʨ]로 발음되는 것이 보통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tr와 ch를 둘 다 ‘ㅉ’으로 적는다. 그러니 Nha Trang은 ‘냐짱’, Hồ Chí Minh은 ‘호찌민’이 된다.
그런데 베트남어 로마자 철자법의 바탕이 된 중세 베트남어에서는 tr가 실제로 t와 r가 결합한 자음군으로 발음되었을 수도 있겠다. 흥미롭게도 17~18세기 문서에는 tr 외에 tl이라는 철자가 나타난다. 1651년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Dictionarium Annamiticum Lusitanum et Latinum)》을 편찬하여 베트남어 로마자 철자법 확립에 크게 기여한 프랑스 출신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로드(Alexandre de Rhodes [alɛksɑ̃ːdʁ də ʁoːd], 1591~1660)는 tla라는 표제어 밑에 l을 r로 바꾸어 tra라고 말하기도 하며 tl로 시작하는 나머지 말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을 단다. 즉 당시 이미 tl은 tr와 합치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베트남어 tla는 ‘집어넣다’를 뜻하는 현대 베트남어 tra ‘짜’에 대응된다. 마찬가지로 ‘물소’를 뜻하는 베트남어 trâu ‘쩌우’는 중세 베트남어 tlâu에서 나왔다.
현대 베트남어 tr는 중세 베트남어 tl 외에 bl에서 나온 것도 있고 중세 베트남어 tl은 현대 베트남어 tr 외에 t나 l로 바뀌기도 했기 때문에 실제 변화는 상당히 복잡하다. 예를 들어 ‘쪽’, ‘페이지’를 뜻하는 trang ‘짱’은 중세 베트남어에서 blang으로 썼다. 어쨌든 로마자 철자와 드로드의 설명을 보면 tr는 원래 t와 r가 결합한 음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즉 이런 발음에서 Nha Trang은 ‘냐뜨랑’에 가깝게 발음되었을 수 있다.
이 지명은 짬어로 ‘갈대 강’을 뜻하는 ꨀꨳꨩꨓꨴꩃ Aiā Trang ‘이아뜨랑’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짬어는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에 짬빠 왕국을 건설했던 짬족이 쓰는 언어로 남도 어족(오스트로네시아 어족)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에 속한다. 남아시아 어족(오스트로아시아 어족)에 속하는 베트남어 및 캄보디아의 공용어인 크메르어와는 계통이 다르다. 참고로 짬빠(Champa)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짬파’로 실려있지만 베트남어 Chăm Pa를 따르면 ‘짬빠’로 써야 하며 짬어 ꨌꩌꨛꨩ Campā의 c와 p도 무기음이므로 ‘ㅉ’, ‘ㅃ’에 가깝다. 그러니 한글 표기에서 된소리를 허용하느냐에 따라 ‘참파’ 또는 ‘짬빠’로 써야 하며 ‘짬파’는 근거가 없다.
tr처럼 철자상 폐쇄음과 유음이 결합한 자음군으로 보이는 것이 권설 폐쇄음 [ʈ] 또는 파찰음 [ʦ̢]로 발음이 바뀐 것은 티베트어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티베트 라싸 근교에 있는 티베트 최대 불교 사원 이름인 འབྲས་སྤུངས་ ‘bras spungs/Dräpung은 라싸식 발음으로 [ʣ̢ɛ̀.puŋ] ‘제뿡’ 정도로 발음되고 중국에서 한어 병음과 비슷하게 티베트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장문 병음(藏文拼音)에 따르면 Zhaibung으로 적는다. 하지만 2010년 경주 동국대의 티벳장경연구소에서 발표한 ‘티벳어 한글 표기안’을 따르면 ‘bras spungs/Dräpung은 ‘대뿡’으로 적는다(표준어는 ‘티베트’이지만 이들은 ‘티벳’이라는 표기를 쓴다). 모음 [ɛ]를 ‘에’와 ‘애’ 가운데 어떻게 적을지를 논외로 하면 첫소리를 파찰음으로 본 ‘ㅈ’ 대신 폐쇄음으로 본 ‘ㄷ’으로 쓴 것이 주목된다.
이들이 한글 표기 기준으로 삼은 방언에서는 철자상 br/dr/gr, pr/tr/kr 등에 해당하는 음이 [ʣ̢, ʦ̢] 등 권설 파찰음이 아니라 [ɖ, ʈ] 등 권설 폐쇄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티베트어에서도 방언에 따라 파찰음이나 폐쇄음이 쓰이므로 한글 표기에서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다. ‘행운’을 뜻하는 티베트어 이름 བཀྲ་ཤིས་ bkra shis/Trashi는 방언에 따라 [ʦ̢ə́.ɕi] ‘짜시’ 또는 [ʈə́.ɕi] ‘따시’로 발음되는데 장문 병음에 따른 중국식 로마자 표기는 Zhaxi이지만 흔히 접하는 통용 로마자 표기는 Tashi이다.
라싸 발음에서는 파찰음을 쓰는 것이 대세이니 이에 따라 ‘bras spungs/Dräpung ‘제뿡’, bkra shis/Trashi ‘짜시’로 적는 것이 무난할 수 있지만 세계 각지에 퍼진 티베트 디아스포라 사회에서는 아직 폐쇄음 발음이 많이 쓰이는 듯하다. 그래서 티벳장경연구소의 표기안에서도 이 발음을 택했을 것이다.
아직 외래어 표기법에서 티베트어는 다루지 않으므로 오늘날의 발음과 차이가 나더라도 아예 로마자 철자에 따라서 ‘드레풍’, ‘트라시’와 같이 쓰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실제로 ‘bras spungs/Dräpung은 ‘드레풍’ 사원이라는 표기가 가장 많이 쓰인다. 그런데 bkra shis/Trashi가 들어간 이름인 བཀྲ་ཤིས་ལྷུན་པོ་ bkra shis lhun po/Trashi Lhünpo ‘짜시륀뽀~따시륀뽀’ 사원은 통용 로마자 표기인 Tashi Lhunpo에 이끌려 ‘타시룬포’ 사원으로 주로 쓰인다.
Nha Trang을 여전히 ‘나트랑’으로 쓰는 것을 보면 혹시나 티베트어 표기 규정이 외래어 표기법에 추가되더라도 ‘드레풍’, ‘타시룬포’ 같은 표기가 계속 쓰일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표기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어마다 방언에 따른 발음 차이는 당연히 존재하니 그 가운데 어느 발음을 기준으로 표기할지는 늘 마주치는 문제이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만 해도 지역마다 다른 발음 차이를 일일이 한글 표기에 반영하려 한다면 끝이 없다. 영어의 new를 현지 발음에 따라 ‘뉴’와 ‘누’로 구별하거나 프랑스어의 saint을 현지 발음에 따라 ‘생’과 ‘상’으로 구별하려는 것은 극히 비현실적이다. 표준 발음을 각각 [njuː], [sɛ̃]으로 보고 ‘뉴’, ‘생’으로 통일하는 것이 편하다. 우스갯소리를 섞어서 현지 발음을 반영한다고 ‘경상도’를 영어로 쓸 때 Gengsang Province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방언에 따른 차이를 무시하거나 어느 한 방언만 대접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 언중 사이의 편리함을 위해 부득이하게 한 가지 표기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러니 Nha Trang을 북부식으로 ‘냐짱’으로 적는 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북부식으로 ‘냐짱’이라고 발음하면 다 알아듣는다(북부 발음의 영향인지 남부에서도 tr의 파찰음 발음이 퍼지는 듯하기도 하다). 대신 현지 발음은 약간 다를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좋다.
베트남어는 지역에 따른 발음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어차피 체계적인 하나의 표기법을 써서 각지에서 쓰이는 발음을 모두 가깝게 흉내낼 방법은 없다. 물론 현행 표기 규정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으며 어떻게 표기하는 것이 가장 대표성이 있고 철자에서 예측하기 쉬운지 따질 수는 있겠지만 단지 규범 표기가 베트남 현지에서 쓰는 발음과 다르다고 해서 표기법이 틀렸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여담으로 영어 화자가 베트남어나 티베트어의 tr, dr를 평소에 영어에서 쓰는 것처럼 발음하면 꽤 가깝게 흉내낼 수 있다. 영어의 /tɹ, dɹ/은 사실 음성학적으로 첫 음이 보통 파찰음화하여 많은 이들이 [ʧɹ, ʤɹ] 정도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영어 training [ˈtɹeɪ̯n.ɪŋ] ‘트레이닝’에서 온 외래어 ‘추리닝’은 영어의 이 현상을 흉내낸 형태이다. 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런 표면 발음을 무시하고 기본음 /t, d/를 살려 영어의 tr, dr에서도 ‘트, 드’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