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훈 샌에 이어 캄보디아 총리가 된 훈 마냇

본 글은 원래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날짜는 페이스북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1985년 이후 38년이나 캄보디아 총리를 지낸 훈 샌(Hun Sen)의 뒤를 이어 캄보디아군 부사령관이자 육군 사령관인 아들 훈 마냇(Hun Manet)이 지난주 캄보디아의 새 총리가 되었다.

크메르 루주 소속 군인이었다가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전쟁 때 베트남으로 전향한 훈 샌은 크메르 루주 정권의 패망 후 베트남이 세운 괴뢰국인 깜뿌찌어 인민 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에서 26세의 나이로 외무 장관을 지냈고 1984년 총리 짠 시(Chan Sy)가 죽자 이듬해 1월 총리로 지명되었다.

캄보디아 내전이 끝나고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 기구 감시 하에 치러진 총선에서 왕당파 정당인 푼신펙(FUNCINPEC)이 훈 샌의 캄보디아 인민당을 누르고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훈 샌은 승복하지 않고 협상 끝에 푼신펙 대표 노로돔 라나릇(Norodom Ranariddh) 왕자가 제1총리, 훈 샌이 제2총리가 되기로 합의했다. 그러다가 훈 샌은 1997년 쿠데타를 일으켜 노로돔 라나릇을 몰아내고 다시 유일한 총리가 되었다.

2013년 부정 선거 의혹 속에 집권당이 평소보다 근소한 표차로 다수당이 된 후 2017년 캄보디아 대법원은 야권 지도자 삼 랑시(Sam Rainsy)와 끔 소카(Kem Sokha)가 힘을 합친 거대 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을 해산시키는 판결을 내려 실질적인 일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당시 구금된 끔 소카는 지난 3월 징역 27년을 구형받아 가택 연금 중이고 삼 랑시는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변변한 야당 없이 치러진 올해 총선에서도 캄보디아 인민당이 압승하였다. 사흘 후 훈 샌은 사임하였고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하무니(Norodom Sihamoni)는 8월 7일 이미 집권당에서 후임 총리 후보로 세웠던 그의 둘째 아들 훈 마냇을 새 총리로 지명했다. 1995년부터 캄보디아 군에 들어가고 같은 해 웨스트포인트의 미국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한 훈 마냇은 올해 4월에는 4성 장군으로 임명된 바 있다. 훈 마냇 정부는 8월 22일 출범하였다.

지금까지 글에서는 2020년에 처음 선보인 크메르어 표기 권고안을 적용하여 캄보디아의 인명과 지명을 한글로 표기하였다. 기존 표기 용례에서는 ‘훈 센’, ‘캄푸치아’, ‘노로돔 라나리드’, ‘삼 랭시’, ‘노로돔 시하모니’로 적었던 이름을 권고안에 따라 ‘훈 샌’, ‘깜뿌찌어’, ‘노로돔 라나릇’, ‘삼 랑시’, ‘노로돔 시하무니’로 각각 적었다.

위에서는 괄호 안에 통용 로마자 표기를 제시했다. 유엔 지명 전문가 그룹(UNGEGN) 표기법에 따른 로마자 표기와 크메르어 철자는 다음과 같다.

Hŭn Sên ហ៊ុន សែន ‘훈 샌’
Hŭn Manêt ហ៊ុន ម៉ាណែត ‘훈 마냇’
Kâmpŭchéa កម្ពុជា ‘깜뿌찌어’
Chăn Si ចាន់ ស៊ី ‘짠 시’
Nôroŭttâm Rânârœtth(ĭ) នរោត្ដម រណឬទ្ធិ ‘*노로돔 라나릇’
Sâm Rângsi សម រង្ស៊ី ‘삼 랑시’
Kœ̆m Sŏkha កឹម សុខា ‘끔 소카’
Nôroŭttâm Sihâmŭni នរោត្ដម សីហមុនី ‘*노로돔 시하무니’

여기서 Nôroŭttâm [nɔroudɑm]은 규칙적으로 옮기자면 ‘노로담’으로 적어야 하나 크메르어 철자에 나타나지 않는 모음에 대응되는 â를 널리 통용되는 로마자에서 o로 적는 경우 ‘오’로 적는 것을 허용한다는 규정에 따라 ‘*노로돔’으로 적는다.

크메르어 한글 표기 권고안과 해설, 표기 용례집은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위 표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하면 찾아볼 것을 권한다.

크메르어의 표기에 대해서는 다룰 수 있는 내용이 많지만 여기서는 ‘훈 센’, ‘훈 마넷’ 대신 ‘훈 샌’, ‘훈 마냇’으로 적기로 한 것에 대해 쓰고자 한다.

UNGEGN 표기에서 ê로 나타내는 ែ는 a계열 자음 뒤에서는 이중 모음 [ae]로, o계열 자음 뒤에서는 [ɛː]로 발음된다. Sên의 ស s와 Manêt의 ណ n은 둘 다 a계열 자음이므로 Hŭn Sên은 [hun saen], Hŭn Manêt은 [hun maːnaet]으로 발음된다. 그러니 실제 발음에 가깝게 하려면 ‘훈사엔’, ‘훈마나엣’으로 적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북부 방언에서는 a계열 자음 뒤의 ê도 [ɛː]로 발음하고 로마자 표기에서도 앞의 자음에 관계 없이 ê로 통일하여 적으므로 한글 표기는 [ɛː] 발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크메르어의 한글 표기 권고안을 준비할 때 기존 외래어 표기법 규정과 일관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이웃하는 언어인 타이어와 베트남어의 표기 규정을 많이 참고하였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타이어의 แ◌ะ ae [ɛ]와 แ◌ ae [ɛː], 베트남어의 e [ɛ:]는 ‘애’로 적는다. 반면 타이어의 เ◌ะ e [e]와 เ◌ e [eː], 베트남어의 ê [e]는 ‘에’로 적는다. 중고모음 [e]는 ‘에’로 적고 중저모음 [ɛ]는 ‘애’로 적어 구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크메르어의 한글 표기 권고안에서도 크메르어의 េ é [eː]는 ‘에’로 적게 하는 반면 ែ ê [ae/ɛː]는 ‘애’로 적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게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2004년에 타이어와 베트남어의 표기 규정이 추가되기 전에는 외래어 표기법에서 [ɛ]를 ‘에’로 적어왔기 때문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물론 《롱맨 발음 사전》을 비롯한 시중의 많은 사전에서도 [e]로 적는 영어의 DRESS 모음은 사실 영미 표준 발음에서 중저모음에 가까운 음가라고 해서 위키백과나 《옥스퍼드 영어 사전》 등에서는 [ɛ]로 쓰며 나도 그렇게 쓰고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어느 기호로 나타내든 영어의 DRESS 모음은 ‘에’로 쓴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표기 규정에서는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를 통해 [ɛ]는 ‘에’로 적도록 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네덜란드어 등에서도 [ɛ]로 발음되는 자모를 ‘에’로 쓰도록 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의 표기에서도 yan, -ian [jɛn]을 ‘옌’으로 적는다(yuan, -üan [ɥɛn]을 ‘위안’으로 적는 것은 논외로 하자).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은 ‘에’와 ‘애’를 구별하지 않지만 보수적인 발음에서는 ‘에’가 중고모음 [e], ‘애’가 중저모음 [ɛ]에 해당된다. 그러니 단순히 한국어의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으려면 [ɛ]는 ‘애’로 적어야 한다. 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한국어에 없는 음인 영어의 [æ]를 ‘애’로 적도록 했기 때문에 [e]와 [ɛ]를 구별하지 않고 ‘에’로 통일시켰다.

만약 [e]와 [ɛ]를 구별하여 ‘에’와 ‘애’로 나누어 써야 한다면 제대로 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에서는 자모 e가 경우에 따라 [e]로 발음될 수도 있고 [ɛ]로 발음될 수도 있다. 독일어 Gel [ɡeːl]과 Hotel [hoˈtɛl]의 예를 들 수 있다. 독일어 이름 Daniel [ˈdaːni̯eːl, -ni̯ɛl]처럼 [e]와 [ɛ] 발음이 혼용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세르보크로아트어처럼 중고모음과 중저모음의 구별이 없는 언어의 경우 전설 중모음을 [e]와 [ɛ] 가운데 어느 것으로 나타낼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타이어와 베트남어의 표기에서는 왜 [ɛ]를 ‘애’로 적도록 했을까? 철자만으로는 [e]인지 [ɛ]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다른 언어와 달리 타이어와 베트남어에서는 원어 철자를 통해 이들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또 한글 표기 규정을 마련한 타이어와 베트남어 전문가들은 원어에서 구별되는 음이니 한글 표기에서도 구별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또 타이어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을 비롯한 대부분의 통용되는 로마자 표기에서는 [ɛ, ɛː]를 ae로 적는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서 ‘애’를 ae로 적는 것에 익숙하다면 타이어의 ae를 ‘애’로 적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겠다.

반면 베트남어의 e를 ‘애’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한국어 화자는 얼마나 될까? 베트남식 부침개 요리인 bánh xèo는 민간에서 ‘*반세오’, ‘*바인세오’ 등으로 보통 쓰고 규범 표기인 ‘바인쌔오’로 적는 일은 보기 힘들다. 다행히 베트남어에서는 e ‘애’보다 ê ‘에’가 훨씬 더 많이 쓰이기 때문에 ‘에’로 쓴다고 해서 틀릴 일은 드물다.

크메르어에서는 어떨까? 크메르어는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 없어서 같은 이름도 여러 로마자 표기가 뒤죽박죽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널리 통용되는 로마자 표기를 기준으로 하면 Bar Kaev로 알려진 지명 បរកែវ Bâr Kêv ‘바르깨오’나 Kuleaen으로 알려진 지명 គូលែន Kulên ‘꿀랜’처럼 ê를 ae나 eae로 적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미 언급한 Hun Sen, Hun Manet 외에도 Prey Veng으로 알려진 지명 ព្រៃវែង Prey Vêng ‘쁘레이뱅’, Takéo로 알려진 지명 តាកែវ Takêv ‘따깨오’처럼 ê를 그냥 e, é로 쓰는 경우가 보통인 것으로 보인다.

‘크메르’라는 이름 자체가 원래 크메르어로는 ខ្មែរ Khmêr [kmae] ‘크매르’이다. 여기서 종성 r는 중부 방언에서 발음되지 않지만 북부 방언에서는 유지되고 로마자 표기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한글 표기에서 ‘르’로 적도록 했다. 북부 방언으로는 [kmɛːr]라고 발음한다. 캄보디아는 예전에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프랑스어로 Khmer는 [kmɛːʁ] ‘크메르’로 발음된다. Khmer Rouge [kmɛːʁ ʁuːʒ] ‘크메르 루주’는 ‘붉은 크메르’를 뜻하는 프랑스어 이름이고 크메르어로는 ខ្មែរក្រហម Khmêr Krâhâm ‘크매르/*크메르 끄라함’이라고 부른다. 굳이 ê를 ‘애’로 적지 않고 ‘에’로 통일한다면 ‘훈 센’, ‘훈 마넷’, ‘크메르’ 등 익숙한 표기가 나온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강인 메콩강은 로마자 Mekong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원래 타이어 แม่น้ำโขง Mae Nam Khong ‘매남콩’을 줄인 แม่โขง Mae Khong ‘매콩’, 라오어 ແມ່ນ້ຳຂອງ Mènam Khong ‘매남콩’을 줄인 ແມ່ຂອງ Mè Khong ‘매콩’에서 나온 이름이다. 같은 이름을 차용하여 크메르어로는 មេគង្គ Mékôngk ‘메꽁’, 베트남어로는 Mê Kông ‘메꽁’이라고 한다.

그러니 타이어·라오어식으로는 ‘매(남)콩강’, 크메르어·베트남어식으로는 ‘메꽁강’이다. ‘ㅋ’과 ‘ㄲ’의 교체는 논외로 하더라도 타이어·라오어의 ‘애’를 ‘에’로 받아들인 것이 흥미롭다.

라오스의 공용어인 라오어는 타이어와 같은 서남따이 어군에 속해있어 타이어와 매우 비슷한 언어이다. 그런데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 없고 위의 Mae Khong/Mè Khong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타이어에서 ae로 적는 음은 통용 로마자 표기에서 è나 e가 되는 경우가 많다. 타이어의 ae는 ‘애’로 옮기는 데 익숙하더라도 라오어의 è를 ‘애’로 적으라고 하면 얼마나 호응이 있을지 모르겠다.

참고로 2018년에 처음 펴낸 라오어의 한글 표기 권고안에서도 타이어 표기 규정을 참고하여 è [ɛ, ɛː]는 ‘애’로 적도록 한 바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가 ‘에’와 ‘애’를 구별하지 못하고 영어의 표기에서도 ‘내비게이션’ 대신 ‘*네비게이션’, ‘스태프’를 ‘*스텝’으로 잘못 쓰는 일이 빈번한 것을 생각하면 라오 문자나 크메르 문자를 확인하여 ‘에’를 쓸지, ‘애’를 쓸지 정하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현실적일지 모르겠다. 차라리 타이어와 베트남어까지 포함해서 동남아시아 언어의 [ɛ, ɛː]는 ‘애’ 대신 ‘에’를 쓰는 것으로 통일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타이의 รามคำแหง Ramkhamhaeng을 ‘람캄행’ 대신 ‘람캄헹’으로, แม่ฮ่องสอน Mae Hong Son을 ‘매홍손’ 대신 ‘메홍손’으로, ขอนแก่น Khon Kaen을 ‘콘깬’ 대신 ‘콘껜’으로 적도록 한다면 반발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훈 센’, ‘훈 마넷’ 대신 ‘훈 샌’, ‘훈 마냇’으로 적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들 언어에서 ‘애’와 ‘에’를 ‘에’로 통일하라는 것이 더 쉬울 듯하다.

외래어 표기법은 이처럼 늘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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