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트랄리움’은 유령 단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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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55년 제작된 트라우토니움의 개량 형태인 믹스투어트라우토니움(Mixtur-Trautonium). 베를린 악기 박물관 소장(Wikimedia: Morn the Gorn, CC BY-SA 3.0).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트랄리움’이라는 말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트랄리움(Tralium) 「명사」 『음악』 독일의 전기 악기. 피아노와 비슷하며 키(key)에 전기를 통하면 음계 따위가 자유로이 연주된다.

그런데 이는 실제로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웬만한 독일어나 영어 사전은 물론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같은 대사전에도 tralium이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쓰이지 않는 단어가 사전에 실린 것을 유령 단어(ghost word)라고 부른다. 유명한 예로 미국의 《웹스터 사전(New International Dictionary)》 2판(1934년)에 실린 dord라는 말이 있다.

dord (dôrd), n. Physics & Chem. Density.

풀이하자면 dord는 dôrd, 즉 [dɔːɹd] ‘도드’로 발음되는 명사로 물리·화학에서 ‘밀도’를 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쓰이지 않는다.

1939년에 편집자 한명이 dord에 어원 설명이 없는 것을 보고 조사해봤더니 어이없는 편집 실수로 인해 잘못 삽입된 표제어로 드러났다. D 또는 d가 ‘밀도’를 뜻하는 density의 줄임말로 쓰일 수도 있다는 설명을 추가하라고 “D or d, cont./density.”라는 내용의 쪽지를 남겼는데 여기서 “D or d”를 “Dord”라는 단어로 착각하고 품사와 발음 설명을 추가하여 표제어로 올렸던 것이다.

그러면 ‘트랄리움(Tralium)’도 이와 같은 유령 단어일까?

실수로 없는 말을 만들 수는 있어도 없는 뜻풀이를 만들기는 어렵다. 실제 있는 말의 뜻풀이에 다른 잘못된 말을 표제어로 대입시킨 결과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에 들어맞는 악기는 ‘트라우토니움’이 아닌가 한다.

1930년에 독일의 전기 기술자 프리드리히 트라우트바인(Friedrich Trautwein [ˈfʁiːdʁɪç ˈtʁaʊ̯tvaɪ̯n])은 새로운 전자 악기를 발명하여 트라우토니움(Trautonium [tʁaʊ̯ˈtoːni̯ʊm])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초창기 형태는 금속 판 위에 있는 가변 저항 현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누르는 위치에 따라 음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물리학자 출신인 독일의 오스카르 잘라(Oskar Sala [ˈɔskaʁ ˈzaːla], 현행 표기 규정으로는 ‘오스카어 잘라’)는 트라우토니움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수차례 이를 개량하였다. 건반처럼 누르는 부분을 포함하여 제법 피아노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독일의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ˈpaʊ̯l ˈhɪndəmɪt])는 트라우토니움을 위한 곡을 여럿 지었으며 잘 알려진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ˈʁɪçaʁt ˈʃtʁaʊ̯s])의 《일본 축전곡》에서도 트라우토니움이 사용되었다.

오스카르 잘라는 트라우토니움으로 영화 음악도 많이 만들었다. 심지어 영국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ˈæl.fɹᵻd ˈhɪʧ.kɒk]) 감독의 스릴러 영화 《새(The Birds)》의 새 소리를 흉내낸 음향 효과도 트라우토니움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트라우토니움(Trautonium)’이 어떻게 ‘트랄리움(Tralium)’으로 둔갑했는지는 수수께끼이다. 로마자로 따지면 한두 자가 뒤바뀐 정도가 아니라 넉 자가 빠지고 다른 한 자로 대체되었으니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명색이 국가 기관인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하는 사전으로서 표준어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류투성이이다. 특히 외래어는 원어 표기나 뜻풀이, 심지어 표제어까지도 잘못된 경우가 수두룩하다. 기존 국어사전의 내용을 확인 없이 베낀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조각가 요한 하인리히 다네커(Johann Heinrich Dannecker [ˈjoːhan ˈhaɪ̯nʁɪç ˈdanɛkɐ])는 원어 표기는 물론 표제어까지 잘못된 ‘데네커(Dennecker, Johann Heinlich)’로 올렸다. 니켈과 강철의 합금을 뜻하는 프랑스어 ‘앵바르(invar [ɛ̃vaːʁ])’는 엉뚱하게 ‘천연으로 산출하는 갈색 안료’를 뜻하는 영어 ‘엄버(umber [ˈʌm.bəɹ])’와 똑같이 풀이하고는 서로 동의어로 제시해놓았다. 벨기에 프랑스어권의 오트레(Ottré [ɔtʁe], 이철자 Ottrez)에서 나는 광물 오트렐라이트(ottrélite)는 원산지의 국가와 언어를 잘못 파악하여 ‘독일의 오트레츠(Ottrez)에서 난다는 설명과 함께 ‘오트레츠-석(Ottrez石)’이라는 표제어로도 올렸다. ‘오트레석’이라고 써야 맞다.

구시대적 뜻풀이가 많이 남아있는 것도 특징이다. 《표준국어대사전》만 보면 아직도 독일에서 마르크, 프랑스에서 프랑, 이탈리아에서 리라를 화폐 단위로 쓰고 있는 것은 물론 ‘우즈베크-인(Uzbek人)’의 뜻풀이에서 ‘성격은 둔중하나 퍽 호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20세기 초에 성행했을 법한 민족성에 대한 태도가 들어가 있다.

외래어 표기를 자세히 보면 일본어 사전을 베낀 흔적이 많다. 표제어의 표기는 제대로 썼지만 뜻풀이에 나오는 외래어는 일본어에서 중역한 탓에 원어를 잘못 파악한 예가 많다. ‘트리아데(Triade)’의 뜻풀이에서는 ‘이집트의 시리스(Osiris)·이시스(Isis)·호르스(Hors)’를 예로 드는데 여기서 ‘호르스(Hors)’는 물론 ‘호루스(Horus)’의 잘못이다. 파키스탄의 산인 ‘마셔브룸-산(Masherbrum山)’ 항목에서는 슐라긴트바이트(Schlagintweit)를 ‘슐러긴트바이트’로 잘못 썼다.

‘지기스문트(Sigismund)’ 항목에서는 ‘북유럽과 독일 전설에 나오는 영웅. 누이동생 시게니와 함께 부왕(父王) 보르숭의 원수를 갚는다’라고 나와 있는데 고대 노르드어로는 시그문드(Sigmundr)·시그니(Signý)·볼숭(Vǫlsungr)으로, 독일어로는 지크문트(Sigmund/Siegmund [ˈziːkmʊnt]), 지그니(Signy [ˈziːɡni]) 또는 지클린데(Sieglinde [ziːkˈlɪndə]), 뵐중(Wölsung [ˈvœlzʊŋ])으로 각각 쓰는 것이 맞다. 독일어에서 Sigismund [ˈziːɡɪsmʊnt] ‘지기스문트’와 Sigmund/Siegmund ‘지크문트’는 다른 이름으로 치고 시그문드를 이를 때는 전자를 쓰지 않으므로 굳이 독일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자면 뜻풀이에 맞는 표제어는 ‘지크문트’로 써야 한다.

이처럼 ‘호루스’를 ‘호르스’로 잘못 쓰거나 ‘볼숭’을 ‘보르숭’으로 잘못 쓴 것은 일본어 중역의 흔적이다. 일본어에서는 ru와 종성 r, l이 모두 ru ‘루’로 표기되기 때문이다. 또 독일어의 [aː] ‘아’와 [ɐ] ‘어’는 일본어에서 둘 다 ā ‘아’로 표기되기 때문에 ‘슐라긴트바이트’를 ‘슐러긴트바이트’로 잘못 썼다.
그러니 외국 인명·지명을 중심으로 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의 외래어 항목은 궁극적으로는 일본어 사전에서 베낀 것이 많은 듯하다. 그러면 ‘트랄리움’도 일본어 사전에 있던 오류일까? tralium에 해당하는 일본어 トラリウム torariumu ‘도라리우무’는 Trarium이라는 매점 이름의 표기로만 검색된다. 트라우토니움의 일본어인 トラウトニウム torautoniumu ‘도라우토니우무’와는 꽤 거리가 있다. 로마자 Tralium을 검색해 보아도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를 베낀 내용 빼고는 트라우토니움과는 관련이 없는 결과만 나온다. 그 가운데는 아파트 브랜드 ‘트라리움’의 로마자 표기 Tralium도 있다.

어느 언어에서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트라우토니움’이 ‘트랄리움’이 된 것은 단순한 오탈자 정도로 설명할 수 없고 일부 문자열을 일괄적으로 대체하면서 나타난 찾아 바꾸기 오류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변신이다. ‘트랄리움’은 그냥 ‘트라우토니움’의 잘못이라고만 하기에는 형태가 너무나도 다르니 유령 단어로 봐도 큰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령 단어라고 하니 뭔가 트라우토니움으로 낼 수 있는 으스스한 소리에 어울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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