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브롱 산괴와 프랑스어 지명의 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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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단편소설 〈별〉(Les Étoiles)의 배경인 뤼브롱 산괴(Massif Luberon).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인들은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 ‘뤼베롱’으로 발음을 잘못 하기가 쉽다.

뤼브롱 산괴의 그랑뤼브롱(Grand Luberon)산에서 본 프티뤼브롱(Petit Luberon)산(사진 출처)

프랑스에서는 ‘브뤼셀’을 잘못 발음한다?라는 글에서 프랑스인들이 같은 프랑스어권인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같은 프랑스의 지명을 잘못 발음하는 예도 많다.

르몽드지에 최근 실린 “Nom de lieux et diable de prononciations(지명과 마의 발음들)”이란 기사를 보니 뤼브롱 산괴의 보니외(Bonnieux) 시에서는 산괴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것을 보다 못해 프랑스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을 위한 책자에 올바른 발음을 명기하고 있다.

2024. 5. 28. 추가 내용: 원래 글을 올렸을 때는 ‘뤼브롱 산’이라고 불렀지만 산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산지 이름이므로 프랑스어 이름에 나오는 massif를 ‘산괴’로 번역하여 ‘뤼브롱 산괴’로 수정했다. 참고로 2017년에 바뀐 외래어 표기법의 띄어쓰기 규정으로는 ‘뤼브롱 산’이 아니라 ‘뤼브롱산’과 같이 붙여 적는다.

Dans le Luberon, on ne décolère pas contre ces “Parisiens” qui formulent le “e” comme dans “bébé” alors qu’il faudrait le dire comme dans “beurrer”.
뤼브롱에서는 철자의 e를 beurrer처럼 발음해야 하는데 bébé처럼 발음하는 ‘파리지앵(파리 주민)’들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한다.

Luberon의 e는 bébé [bebe]의 [e]가 아니라 beurrer [bœʁe]의 [œ]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이다.

Luberon의 올바른 발음은 [lybəʁɔ̃]이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뤼브롱’으로 적는다. 여기서 [ə]로 적는 음은 사실 위 설명의 [œ]와 같은 음이다.

프랑스어의 e는 /e/ 또는 /ɛ/로 발음될 수도 있고 무강세 모음인 /ə/로 발음될 수도 있으며 /ə/인 경우 환경에 따라 생략이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 프랑스의 발음에서 /ə/는 사실 [œ] 또는 [ø]로 발음된다(프랑스 남부나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ə] 발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보통은 [œ]로 발음되고 어말 대명사 le에서는 [ø]로 발음된다. 즉 Dis-le /dilə/는 [dilø]로 실현된다. 이 경우는 e를 탈락시킬 수 없다. 또 다음 음절의 모음이 전설모음일 경우에도 /ə/는 [ø]로 발음된다. 그래서 je dis /ʒədi/ [ʒødi]는 jeudi [ʒødi]와 발음이 같아진다. 하지만 je dis의 경우 e를 탈락시켜 [ʒdi]로 발음할 수 있다.

이 무강세 e /ə/는 환경에 따라, 말 하는 빠르기에 따라, 개별 화자의 습관에 따라 탈락할 수도 있고 발음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프랑스어의 /ə/를 ‘으’로 적도록 하고 있다. 외래어 표기에서 모음이 없을 때 삽입하는 모음 ‘으’와 같기 때문에 보통 /ə/의 탈락 여부가 표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Rabelais가 [ʁablɛ]이든 [ʁabəlɛ]이든 표기는 ‘라블레’가 된다.

Luberon은 사실 철자만 보면 e가 /ə/를 나타낼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왜 타지인들이 /e/로 알고 발음하는 것일까? 아마 음절 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Luberon의 e가 /ə/라면 파리 등 북부에서는 이를 탈락시킨 /lybʁɔ̃/으로 두 음절로 발음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북부 발음에서는 /ə/는 웬만하면 탈락시키려고 한다. 탈락시킨 결과 세 개 이상의 자음이 연속하게 되어 발음이 어려워지는 경우에만 /ə/를 유지한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ə/를 철자대로 발음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프로방스 지방은 원래 프랑스어와는 다른 언어인 프로방스어 사용 지역이었으며 프랑스어를 학교에서 외국어처럼 배웠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철자상의 e는 보통 탈락시키지 않고 발음한다. 그래서 Luberon은 세 음절로 발음한다. 북부인들은 Luberon이 세 음절로 발음된다는 것을 듣고 e가 /e/라서 탈락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뤼베롱’이라고 발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파리지앵’들에게 세 음절로 발음한 [lybəʁɔ̃]은 좀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이들도 철자상의 e를 모두 발음하는 이들이 많고 한글 표기도 이에 이끌리는 일이 많다. Elle [ɛl], Seine [sɛn], homme [ɔm]을 ‘엘르’, ‘센느’, ‘옴므’로 적는 것이 그 예이다. 프랑스 표준 발음에서는 이들의 어말에 [ə]를 붙이지 않는다. 어말에 [ə]가 오는 Fais-le [fɛlə]와 모음이 붙지 않는 elle [ɛl]의 발음은 꼭 구별된다. 한글 표준 표기도 ‘엘’, ‘센’, ‘옴’이다.)

기사에서 든 다른 예들을 살펴보자.

  • Cassis: 현지에서는 ‘카시’ [kasi]가 올바른 발음인데 외부인들은 ‘카시스’ [kasis]라고 발음하는 일이 많다. 현지인 한 명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파리(Paris)가 s로 끝난다고 ‘파리스’라고 발음하냐고 반문한다.
  • Chamonix: ‘샤모니’ [ʃamɔni]가 올바른 발음이다. 방문객 80%는 ‘x’를 발음한다고 이들을 맞이하는 한 여인이 불평한다.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여러 지명의 마지막 자음은 묵음이다. 아보리아(Avoriaz), 라클뤼자(La Clusaz), 케라(Queyras)… 하지만 Servoz에서는 마지막 자음을 발음해서 세르보즈 [seʁvoːz] 또는 세르보스 [seʁvɔs]이다.
  • Wissant: ‘비상’ [visɑ̃]도 아니고 ‘우이상’ [wisɑ̃]도 아니고 ‘위이상’ [ɥisɑ̃]이란다.
  • Sainte-Menehould: 철자는 복잡하지만 ‘생트므누’ [sɛ̃tmənu]라고 발음한다.

2024. 5. 28. 추가 내용: 지금은 프랑스어의 [wi]와 [ɥi] 둘 다 ‘위’로 적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Wissant [ɥisɑ̃]은 ‘위상’으로 적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현행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wi]는 ‘우이’, [ɥi]는 ‘위이’로 적게 된다. 여기서는 그 발음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두 음절로 나누어 적었다. 하지만 한국어 화자에게는 [wi]나 [ɥi]나 둘 다 ‘위’로 들린다.

기사 내용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기사에서는 국제 음성 기호를 쓰지 않았고 프랑스어식 철자로 발음 설명을 했다. Cassis는 사전에서 [kasi]와 [kasis]를 모두 인정하는 듯하다.

기사에서는 프랑스 전역의 지명을 순서 없이 다뤘다. 알프스 지역에서 마지막 자음은 묵음이다고 했는데 이는 알프스 북부의 전통 프랑코프로방스어(francoprovençal) 사용 지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프랑코프로방스어 지명은 -az, -oz (-otz), -uz, -ax, ex, -ux, -oux, -ieux (-ieu)로 끝나는 것들이 많다. 이는 중세 사부아(Savoie) 지방의 서기들이 프랑코프로방스어의 발음을 나타내기 위해 고안한 철자법에서 왔다. 이들은 끝 음절에 강세가 올 경우 x를 끝에 붙이고 끝 음절이 약화되어서 그 전 음절에 강세가 올 경우 z를 끝에 붙였다. 그러니 -x와 -z는 원래 실제 음가가 있던 것이 아니다(내용 출처).

후에 이 표기 관습에 대한 무지로 특히 인명에서 철자상의 -x와 -z를 발음하는 경우가 생겼다. 전통 프랑코프로방스어 사용 지역 출신의 작곡가 Hector Berlioz의 성도 원래는 [z] 발음이 없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bɛʁljoːz]라고 발음한다. 외래어 표기 용례 자료에 실린 표준 한글 표기도 ‘엑토르 베를리오즈’이다. 그러나 현지 지명에서만큼은 아직도 어말 -x와 -z가 대부분 묵음이다.

그런데 알프스 남부는 전통적으로 프랑코프로방스어가 아니라 오크어 사용 지역이니 반대로 마지막 자음이 발음되는 경우도 꽤 있다. 전통 오크어 지역은 어말의 자음을 발음하기도 하고 발음하지 않기도 하니 일일이 발음을 알아보는 수 밖에 없다. 기사에서 예로 든 케라(Queyras)는 전통 오크어 사용 지역인데 -s 발음을 하지 않는 경우이다.

프랑스의 전통 지역 언어

프랑코프로방스어, 오크어, 프로방스어…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약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 널리 쓰이던 지역 언어들이다. 프랑스어의 방언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로망 어군 언어들이다.

오크어(langue d’oc) 또는 옥시타니아어(Occitan)는 프랑스 남부에서 널리 쓰이던 언어로 카탈루냐어와 비슷하다. 프로방스어는 오크어의 방언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뤼브롱 산괴는 전통 프로방스어 사용 지역에 있고 알프스 남부 지역은 프로방스어가 아닌 북부 오크어 방언 사용 지역이다.

프랑코프로방스어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스위스, 이탈리아의 국경 지대에서 쓰인 언어로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는 이탈리아의 발레다오스타(Valle d’Aosta) 주에 사용자가 제일 많이 남아있다.

프랑스어는 오일어(langue d’oïl)라는 방언군에 속한다. 이 명칭은 ‘예’를 뜻하는 단어로 oïl을 썼다고 해서 oc를 쓴 오크어와 대비시킨 이름이다. 이 oïl은 현대 프랑스어의 oui [wi]가 되었다. 오일어 가운데에도 여러 방언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 족이 쓴 노르망디어는 영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08년 개봉한 프랑스 코미디 영화《웰컴 투 슈티》(Bienvenue chez les Ch’tis)는 프랑스 최북단의 작은 마을을 소재로 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이 영화에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슈티’라는 방언은 피카르디어(Picard)라고도 불리는 오일어 방언이다.

로망 어군에 속하는 프랑스의 지역 언어는 오일어, 오크어, 프랑코프로방스어 외에도 코르시카섬에서 쓰이는 코르시카어가 있고 이탈리아에서 더 많이 쓰이는 리구리아어, 스페인에서 더 많이 쓰이는 카탈루냐어도 프랑스 국경 지대에서 일부 쓰인다.

로망 어군에 속하지 않는 지역 언어도 있다. 동부에서는 독일어 방언인 알자스어와 로렌 프랑코니아어가 쓰이며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는 켈트어파에 속하는 브르타뉴어 사용자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지 않는 바스크어도 쓰인다. 바스크 지방의 대부분은 스페인에 있지만 프랑스에도 일부가 걸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다언어 국가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앙리 그레구아르(Henri Grégoire)는 당시 프랑스 인구 2천 5백만 명 가운데 3백만 명 만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지역 언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공공 생활과 학교에서 프랑스어만 쓸 수 있게 한 정책으로 지역 언어는 점차 프랑스어에 밀려났다. 1900년경에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비율이 프랑스 인구의 반으로 증가했고 현재는 이민자를 제외한 프랑스인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

지금은 사용자 수가 많이 줄었지만 프랑스의 여러 지역 언어는 프랑스의 지명과 인명에 흔적을 많이 남겼다. 각 언어마다 철자법과 발음 습관이 다르니 프랑스인들도 자국 지명의 발음을 제대로 모르는 일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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