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에 있는데 한국어에 없는 발음으로 대표적인 것이 무성 순치 마찰음 [f]이다. 영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언어, 중국어, 아랍어, 힌디어, 태국어, 베트남어 등 우리가 접하는 주요 외국어에서 흔히 쓰이는 발음이지만 한국어에는 비슷한 발음조차 없어 ‘ㅍ’, 즉 [pʰ]로 흉내낸다(수정: 힌디어는 외래어에만 [f]를 쓰니 제외). [f]는 윗니와 아랫입술로 조음한다 해서 순치음으로 분류되는데 한국어에는 순치음 자체가 없고, 좁은 틈으로 공기를 마찰시켜 내보내는 소리라고 해서 마찰음으로 분류되는데 한국어에서 마찰음은 ‘ㅅ’ 계열 변이음과 ‘ㅎ’ 계열 변이음 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어로 말하면서도 [f]를 쓰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물론 다른 언어도 구사하는 화자들 가운데는 외래어를 발음할 때마다 해당 외국어의 발음에 가깝게 발음하는 이들도 일부 있다. 하지만 [f]를 섞어 쓰는 현상은 더 보편적인 것 같다. 한국어에 없는 다른 발음, 즉 [v, θ, ð, ɹ] 등은 쓰지 않고 다른 것은 다 표준 한국어 발음대로 하는데 유독 [f]만 섞어 쓰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아나운서들도 ‘펀드(fund)’, ‘프랑스(France)’ 등의 ‘ㅍ’을 한국어에서 보통 쓰는 [pʰ] 대신 [f]로 대체하여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f] 음을 나타내는 가상의 한글 자모 상상도(재미 삼아 그린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길). 보통은 무성 양순 마찰음 [ɸ]의 음가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옛 한글 자모 ‘ㆄ'(순경음 ㅍ)을 쓰자는 주장이 많다. 글꼴은 나눔명조.
혹자는 이와 같이 외래어의 발음에서 [f]를 쓰는 것을 외국어 발음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그것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펀드’를 영어의 fund처럼 [fʌnd]라고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으’ 음을 붙여서 [fʌndɯ]라고 발음한다. ‘펀드’의 보통 한국어 발음은 [pʰʌndɯ]인데 여기서 [pʰ]를 [f]로 대체하기만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pʰɯɾaŋs”ɯ]라는 일반적인 발음에서 [pʰ]만 [f]로 대체한 [fɯɾaŋs”ɯ]로 발음한다. F 발음을 한다는 것 외에는 프랑스어의 [fʁɑ̃s]나 영어의 [fɹɑːns]에 특별히 가깝게 발음하지는 않는다.
이런 화자들은 원어에 [f]가 들어가는 외래어를 원어 발음대로 한다기보다는 한국어의 기본적인 음소 목록에 [f]를 추가하는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다른 언어의 사례
전세계 언어의 음운 체계를 분석할 때 그 언어의 고유 어휘에는 쓰이지 않는데 외래어의 발음에만 쓰이는 음운을 흔히 찾을 수 있다.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f] 음이 기본 음소가 아닌 언어들을 몇몇 알아보자.
필리핀어. 필리핀어는 타갈로그(Tagalog)라는 언어를 표준화한 필리핀의 국어이며 [f]나 [v] 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필리핀은 스페인(에스파냐)과 미국의 통치를 받은 적이 있어 스페인어와 영어에서 받아들인 어휘가 많은데, 원어의 [f]는 [p]로, [v]는 [b]로 대체한다. 스페인어의 fiesta는 필리핀어에서 piyesta 또는 pista이고 영어의 television은 필리핀어에서 telebisyon으로 받아들였다.
필리핀어에서 쓰는 로마 문자에는 F, V 등의 문자도 포함된다. 많은 이들이 스페인어 또는 영어 이름을 쓰기 때문이다. 발음 안내 사이트 Forvo.com에서 한 필리핀어 화자가 1965년에서 1986년까지 장기 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대통령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들으니 [f] 발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발음 듣기). 그러니 필리핀어에서는 일반 외래어에는 원어의 [f]를 [p]로 대체하지만, 이름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 [f]를 쓰기도 하는 듯하다.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사진 출처)
핀란드어. 남서부 방언을 제외하면 핀란드어 고유 어휘에서는 [f]가 쓰이지 않는다. 대신 핀란드어에는 v로 표기하는 음이 있는데, [f]와 조음 위치가 같은 순치 접근음 [ʋ]이다. 이 [ʋ]는 [v]와 비슷하지만 마찰이 없어 [w]와 [v] 중간 음으로 들린다. 오래 전에 들어온 외래어에서 원어의 [f]는 보통 [ʋ]로, 어중에서는 때로 [hʋ]로 대체된다. 예를 들어 ‘커피’를 뜻하는 스웨덴어의 kaffe는 핀란드어에서 kahvi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더 최근 들어온 외래어에서는 원어의 [f]는 f로 표기하는데, 이 때 발음도 [f]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일상 언어에서 때로 f로 적은 것도 [ʋ]로 발음하기도 한다. ‘아스팔트’를 뜻하는 asfaltti, ‘유니폼’을 뜻하는 uniformu가 최근 들어온 외래어로서 f 표기를 쓰는 예이다. 이들은 때로 [f]를 [ʋ]로 대체한 발음을 반영해 asvaltti, univormu라고 쓰기도 한다.
일본어. 일본어에는 [f]음이 없지만 /h/가 /u/ 앞에 올 때, 즉 は행의 ふ에서 양순 마찰음 [ɸ]로 발음된다. 이 소리는 위아래 입술로 조음되는 것이 다를 뿐 [f]에 꽤 가까운 소리이다. ふ는 널리 쓰이는 헵번식 로마자 표기에서 fu로 표기하며 훈령식 표기와 일본식 표기에서는 hu로 표기한다. 일본어 고유 어휘에서 [ɸ]는 /u/ 앞에서만 발음될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된 외래어일수록 원어의 [f]가 /u/ 이외의 모음 앞에 올 때는 /h/ 또는 드물게 /p/로 대체했다. 포르투갈어의 confeito는 金米糖(kompeitō)가 되었으며 네덜란드어의 koffie는 コーヒー(kōhī), morfine는 モルヒネ(moruhine)가 되었다. 영어의 wafers는 ウエハース(wehās)로 받아들였다. 한국에서도 영어 발음을 직접 받아들인 ‘웨이퍼’보다 일본어를 거친 ‘웨하스’가 더 널리 쓰이는 듯하다.
웨이퍼(wafer)는 일본어 ウエハース를 거친 ‘웨하스’로 더 널리 알려져있다.
하지만 더 최근에 들어온 외래어에서는 일본어 고유 어휘에서는 /u/ 앞에서만 쓰는 [ɸ]를 다른 모음 앞에서도 쓰고 가타카나로 ファ [ɸa], フィ [ɸi], フェ [ɸe], フォ [ɸo] 등으로 표기한다. 영어의 fight는 ファイト(faito), 프랑스어의 profil은 プロフィール(purofīru)가 되는 식이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통해 최근에 들어온 외래어에 한해 원어의 음운 제약이 느슨해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외래어의 발음을 위해 [f] 발음을 허용하는 경우도 일부 화자는 더 익숙한 다른 발음으로 대체하기도 해 새 음소로서의 지위는 불안정하다.
한국어에 [f] 발음을 추가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많은 한국어 화자들이 [f]를 외래어의 발음에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f]도 제한적으로나마 한국어 음소로 간주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f]를 섞어 쓰는 화자들마저 실제 [f]와 [pʰ]를 규칙적으로 구분하는 것 같지는 않다. [f]를 발음할 수 있다고 해서 [f]와 [p] 소리를 꼭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외국어에 대한 웬만한 지식 없이는 언제 [f]를 써야 하는지 알기도 힘들다. 한글 표기로는 외래어의 원음이 [f]인지 [p]인지 구별 없이 ‘ㅍ’으로 적기 때문에 원어에서 [p]를 쓰는 경우에도 [f]를 쓰는 일도 드물지 않다. 테니스 중계를 하는 해설자가 ‘포인트(point)’를 발음하며 계속해서 [f] 발음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 ‘펠프스(Phelps)’처럼 원어에 [f]와 [p]가 섞인 경우는 더욱 실수가 많다.
어떻게 보면 [f] 발음은 원어의 발음을 존중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래어의 발음을 외국어답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외래어의 ‘ㅍ’ 발음에 무조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외국어 교육이 아무리 보급되었다 해도 한국어 화자 가운데 많은 이들은 [f] 발음을 하지 못한다. 또 한국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이 외국어를 배워 유창하게 구사하는 경우도 해당 언어에서 [f]와 [p]를 혼동하는 실수를 흔히 본다. 이를 생각하면 [f]를 외래어 발음이라는 제한적인 용도로라도 한국어의 발음에 추가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외래어를 발음할 때에 원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하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대다수 언중이 발음하고 구별하기에 너무 낯선 발음을 써서 언어 생활에 혼란을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위의 다른 언어 사례에서 본 것처럼 상황이 바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위들 언어는 [f]를 받아들인 발음을 표기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 필리핀어와 핀란드어는 f를 써서, 일본어는 フ를 써서 기존의 음운과 구별한다. 한글로 [f]를 기존 다른 발음과 구별하여 적게 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f]가 한국어에서도 쓰이는 발음으로 인정되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