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수도는 브뤼셀이다. 벨기에 북부에서는 네덜란드어, 남부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는데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의 사용자 비율은 대략 3:2이다. 소수이지만 동쪽에는 독일어 사용자도 있으며 세 언어가 모두 공용어이다.
벨기에의 언어 분포.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 프랑스어 사용 지역, 독일어 사용 지역. (그림 출처)
지도를 보면 수도 브뤼셀은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사용 지역 간의 경계선 북쪽에 있다. 하지만 브뤼셀과 수도권 지역에서는 프랑스어 사용자가 대다수이며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가 둘 다 공용어이다.
브뤼셀은 프랑스어로 Bruxelles이라고 쓰며 발음은 [bʁysɛl]이다. 발음에 따라 한글로 표기하면 ‘브뤼셀’이다. 우리야 ‘브뤼셀’이라는 표기에 워낙 익숙하니 전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벨기에 남쪽의 이웃 프랑스에서는 Bruxelles을 [bʁyksɛl], 즉 ‘브뤽셀’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어에서 x라는 철자는 [ks]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으니 Bruxelles이라는 철자를 보고 발음이 ‘브뤽셀’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엄격하게는 ‘브뤽셀’은 틀린 발음으로 간주되고 현지에서 쓰는 발음인 ‘브뤼셀’을 옳은 발음으로 쳐주는 것 같다. 고유 명사를 포함한 프랑스어 사전에도 맞는 발음은 ‘브뤼셀’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프랑스어에서 틀리기 쉬운 것을 소개하는 책에도 ‘브뤽셀’이란 발음은 틀렸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프랑스 방송의 아나운서들도 ‘브뤼셀’이라고 발음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 올바른 언어 사용에 신경을 쓰는 이들, 한국으로 치면 ‘짜장면’ 대신 ‘자장면’을 고집하는 이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만난 프랑스인들은 모두 벨기에의 수도를 ‘브뤽셀’이라고 불렀다. 방송에서도 ‘브뤽셀’이란 발음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심지어 ‘김대중’ 같은 한국 이름도 한국어의 발음에 가깝게 발음하는 등 고유 명사 발음에 평소 각별한 신경을 쓰는 라디오 프랑스 앵테르나시오날(Radio France Internationale)에서도 ‘브뤽셀’이란 발음을 들을 수 있다.
철자는 알아도 발음은 모른다
‘브뤼셀’ 혹은 ‘브뤽셀’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외국의 지명을 한글로 표기할 때 현지 발음을 알기 위해 같은 언어권의 사람들에게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어에서 ‘브뤼셀’이라는 표기가 굳어진 것은 네덜란드어 이름인 Brussel ([ˈbrʏsəl], ‘브뤼설’)이나 결정적으로 영어 이름인 Brussels ([ˈbrʌs(ə)lz], ‘브러슬스’)에서 [ks] 발음이 나지 않는 덕분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올바른 발음에 따른 표기가 되었다. 만약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들리대로 ‘브뤽셀’이라고 표기를 정했더라면…
한글로 쓰인 지명은 자음동화(‘선릉’은 [설릉]이냐 [선능]이냐), 사잇소리 첨가(‘학여울’은 [항녀울]이냐 [하겨울]이냐) 등 일부 음운 현상을 빼면 발음을 예측하기가 쉽다. 한국어 발음과 한글 철자의 관계가 꽤 규칙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어 가운데는 표기만으로는 발음을 제대로 예측하기 힘든 예가 많다. 비중이 큰 외국어 가운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 세 언어에 대해서는 철자 대신 발음 기호(국제 음성 기호)를 보고 한글 표기를 정하도록 하고 있다.
영어 지명의 발음은 영어를 하는 사람에게 확인하기만 하면 되고, 프랑스어 지명의 발음은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에게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발음을 알만한 사람에게 확인해야 한다.
영국 사람 가운데 미국 아이오와 주의 Des Moines ([dɪˈmɔɪn], ‘디모인’)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주 이름인 Arkansas ([ˈɑrkənsɔː], ‘아컨소’, 표준 한글 표기는 ‘아칸소’)의 발음도 잘 모르는 이가 꽤 될 것 같다. 반대로 아마 미국 사람 가운데 영국의 Warwick ([ˈwɒrɪk], ‘워릭’)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고 Edinburgh ([ˈed(ə)nb(ʌ)rə], ‘에든버러’)마저도 발음을 잘못 아는 이가 상당할 것 같다. 오스트레일리아의 Brisbane ([ˈbrɪzbən], ‘브리즈번’)의 발음을 오스트레일리아를 잘 모르는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제대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잘 알려진 지명이 아니면 그 나라 안에서도 발음을 잘 모르기 쉽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 지방 출신이 아니면 자국의 Auxerres ([osɛʁ], ‘오세르’), Metz ([mɛs], ‘메스’)도 ‘옥세르’, ‘메츠’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철자를 보고 발음을 얼렁뚱땅 맞추는 것이다. 프랑스 동부의 독일어에서 유래한 지명, 미국 동부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한 지명 같은 경우 철자가 어찌나 생소한지 외부인들은 올바른 발음을 절대 짐작 못하는 것이 많다. 지명의 발음이 워낙 불규칙적이니 지역 토박이들은 주변의 지명을 제대로 발음하는 법을 안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삼는다.
그래서 외국어 지명의 한글 표기를 정할 때는 이런 지명들의 올바른 발음을 알려주는 지명 사전이 유용하다. 아쉽게도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지명 사전은 대부분 발음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그래도 나라 별로, 주 별로, 군 별로 지명의 발음을 알리는 사이트는 꽤 많이 찾을 수 있다. 맛보기로 몇 개만 소개한다. 개인 홈페이지의 일부인 것도 있어 얼마나 믿을만한 자료인지는 모르지만 이들 언어에서 지명의 올바른 발음을 알아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The Columbia Gazetteer of the World Online (영어, 유료 회원가입 필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지명 (영어)
미국 메릴랜드주의 지명 (영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지명 (영어)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지명 (프랑스어)
핑백: 뤼브롱 산괴와 프랑스어 지명의 발음 – 끝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