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문답 바통 넘겨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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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c84님께서 바톤/배턴/바통 받았음에서 제게 배턴/바통을 넘겨주셨습니다. imc84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바톤’이라는 표기가 널리 쓰이고 있지만 영어 발음을 따른 ‘배턴’ 또는 프랑스어 발음을 따른 ‘바통’만이 표준어로 인정되는 표기입니다.

동일한 질문 패턴을 바탕으로 정해주신 주제에 대해 이어서 글쓰기하는 것 같은데 제게는 ‘언어정책’이라는 조금 부담스러운 주제를 주셨네요. 정확히 어떤 종류의 언어정책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답해보겠습니다.

주어진 질문은
1. 최근 생각하는 ~
2. 이런 ~ 감동!
3. 직감적으로 ~
4. 좋아하는 ~
5. 이런 ~ 싫어
6. 다음에 넘겨줄 7명
이렇게 되겠습니다.

1. 최근 생각하는 언어정책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사이의 외교 분쟁으로 번지고 있는 슬로바키아의 새 언어법(추유호님께서 쓰신 슬로바키아의 이상한 법 참고)을 계기로 한 언어의 사용을 장려하는 것과 다른 언어를 탄압하는 것의 경계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변화하는 정치적 현실에 따라 어제 우위에 있던 언어가 오늘 소수 언어로 전락하는 일이 있기에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슬로바키아의 새 언어법이 슬로바키아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 헝가리계에 대한 언어 탄압이라는 비판이 헝가리를 중심으로 일고 있습니다. 슬로바키아가 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시절 슬로바키아어 말살과 슬로바키아의 헝가리화 정책이 실시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상황이 역전된 셈이라고 말할 수도 있죠. 20세기 이전 유럽 국가에서는 소수 언어에 대한 탄압이 당연한 것이었으니 헝가리가 특별히 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 체코만 해도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독일어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할 구실을 제공한 역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에스토니아인 관광객 두 명을 만났습니다. 한 명은 러시아인 아버지와 고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다른 한 명은 에스토니아인 아버지와 벨라루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둘 다 집에서는 러시아어를 쓰고 둘이서도 서로 러시아어를 씁니다. 공용어인 에스토니아어도 능숙하게 구사합니다. 소련 치하의 에스토니아에는 비에스토니아인이 대대적으로 이주하여 에스토니아어가 러시아어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어가 우대를 받는 것은 당연했고요. 그래서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되찾은 후 에스토니아어의 공용어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이주자들에게 에스토니아어를 배우는 조건으로 시민권을 주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2006년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서는 에스토니아의 언어정책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냈고,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지는 이에 대해 국제사면위원회가 러시아의 선전에 동조하고 있다며 에스토니아를 옹호하는 사설을 실었습니다(전문은 여기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2. 이런 언어정책 감동!

순수히 언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만 본다면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어로 사용되지 않던 히브리어가 이스라엘의 국어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만큼 감동적인 예를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은 4세기경까지는 히브리어를 썼지만 그 이후 아람어, 나중에는 아랍어를 썼습니다. 모어 사용자가 전무한 상태였던 언어에서 다시 수백만 명의 모어가 된 예는 히브리어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어가 부활된 것은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오는 부르주아 유대인들의 언어인 이디시어에 맞선 대안으로서였다는 정치적인 성격이 짙었습니다. 시온주의와의 연관도 있고… 현대 이스라엘 히브리어가 고대 히브리어를 얼마나 잘 계승했는지도 논란이 됩니다. 그래도 유대교 경전(기독교의 구약성경 포함)과 탈무드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한 나라의 공용어로 부활했다는 사실은 솔직히 감동적입니다.

3. 직감적으로 언어정책

‘필요악’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설명이 필요하겠죠?

언어학을 공부하면 규범주의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을 가지게 돼있습니다. 언어는 언중에 의해 자연스럽게 변화하기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규칙에 맞게 언어를 재단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모든 것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맡겨놓을 수 없고 어느 정도의 규제가 필요한 것처럼 언어에도 일정한 규범이 필요합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데 장애가 없으려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선택하여 각종 문법을 통일한 표준어가 필요합니다. 제가 외래어 표기법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같은 외국어 이름의 표기가 제각각인데에 따른 혼란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언어정책은 언어의 정상적인 발전을 억압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언중이 공통된 언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틀을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규범 언어는 어느정도 보수적일 필요가 있지만 현실 언어와 차이가 커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검토하고 보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좋아하는 언어정책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언어정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정책이라 하기는 좀 무리인 것 같고…

청각장애인들에게 수화와 구화를 동시에 교육시키는 스웨덴의 이중언어정책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청각장애인들에게 비장애인들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비장애인들과의 소통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언어정책 아니겠습니까?
http://omni.or.kr/new/main.html?doc=other&read=noticeview&num=900

5. 이런 언어정책 싫어

세계사를 통틀어 언어에 대한 탄압 사례는 수없이 많은데 새삼스럽게 열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정서법이나 전사법 같은 것을 마련하는 중요한 언어정책을 전문가의 의견을 모으고 충분한 토론을 거치는 과정 없이 세우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특히 독재자들의 변덕에 따라 한 나라의 언어정책이 좌우되는 모습은 참 안쓰럽습니다.

미얀마(버마)의 군부가 1989년 영어 국명을 Burma에서 Myanmar로 바꾼 것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따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국민들을 대변하지 않는 독재 군부가 어떻게 국명을 맘대로 바꿀 수 있느냐는 항의의 표시였겠죠. 하지만 혼란스럽던 미얀마 지명의 표기를 개정하고 통일시키기 위해 군부가 설립한 위원회에 언어 전문가가 부족하여 언어학적으로도 워낙 조잡한 표기안을 내놓았다는 비난도 면할 수 없습니다. 당장 Myanmar의 원어에는 [r] 발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영어 표기에서 r는 마지막 ‘아’ 모음이 길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붙인 것입니다. 언어학을 잘 모르는 군인들과 공무원들이 아니라 진짜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였다면 그런 식의 표기로 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얀마의 지명 표기에 관한 영어 블로그 글:
http://www.languagehat.com/archives/003586.php

6. 다음에 넘겨줄 7명

제게는 그런 인맥이 없습니다… 평소에 링크해둔 블로그도 많지 않고 그것도 그냥 조용히 읽기만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뜬금없는 부탁을 드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바통을 넘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제가 링크한 분 가운데 제게 바통을 넘겨주신 imc84님과 이미 문답을 하신 슈타인호프님을 빼면 딱 일곱 명이네요. 왠지 쓰실 거리가 있을 것 같은 주제어를 고른다고 골랐는데 쓰기가 어렵다면 그냥 편히 맘대로 해석하셔서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바쁘신 와중에 쓰시리라고 기대하지도 않겠습니다. 꼭 이 문답 형식이 아니고 제가 생각한 주제어와 맞지 않더라도 언제 시간나실 때 몇 자 적어주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바통을 넘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펜큐어님께 ‘헌책방’
joyce님께 ‘덴마크’
파리13구님께 ‘프랑스 영화’
새퍼 양파님께 ‘외국 생활’
jeltz님께 ‘이슬람사’
daewonyoon님께 ‘번역’
추유호님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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