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언어의 다양성에 웬만큼 익숙한 이들에게도 ‘언어란 이런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주는 언어가 있다. 브라질 중부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 마이시(Maici)강 유역에 사는 수렵채집인들인 피라항족이 쓰는 언어가 그것이다.
피라항어에는 색이나 숫자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고 인칭대명사는 아마존 유역에서 여러 집단들이 서로 소통할 때 쓰는 언어인 녜엥가투어(Nheengatu)에서 모조리 빌려온 듯하다. 피라항족 남성들은 밀림에서 사냥을 할 때 휘파람을 통해 “말”을 할 수 있다.
피라항어를 30년 동안 연구한 언어학자 대니얼 에버렛(Daniel Everett)은 2005년 〈피라항어에서의 문법과 인지에 대한 문화적 제약(Cultural Constraints on Grammar and Cognition in Pirahã)〉이라는 글을 발표해 언어학계를 뒤집어놓았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 이론, 특히 반복순환 능력(recursion)이 모든 자연 언어에 공통되게 나타난다는 주장에 반기를 든 것이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에버렛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였고 촘스키는 에버렛을 돌팔이(charlatan)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피라항어 문법에 대한 연구는 상당 부분 에버렛에 의존하고 있으니 피라항어에 대한 그의 여러 주장에 의구심을 가지는 이들도 많다.
에버렛은 피라항족 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배운 이야기를 2008년 11월 Don’t Sleep, There are Snakes: Life and Language in the Amazonian Jungle이란 책으로 펴냈다.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이란 제목의 한국어판이 이번 달에 출간되었다.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의 한국어판 표지
Pirahã의 표기
이 신간 소개를 읽으면 Pirahã을 ‘피다한’으로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런 표기가 나왔을까?
Pirahã이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피라항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아파이치소(xapaitíiso, [ʔàpài̯ˈʧîːsò])’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하니 주변의 다른 부족들이 부르는 이름이 아닐까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영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Pirahã는 포르투갈어로는 Pirarrã라고 쓴다고 한다. 그 글의 토론 문서에는 에버렛 자신이 쓰는 발음은 [piɾaˈhã]라는 제보가 있다. 이 발음이 맞다면 한글 표기는 ‘피라항’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ã]은 [a] 모음이 비모음으로 발음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외래어 표기법에서 통상적으로 비모음은 ‘ㅇ’ 받침으로 나타낸다.
포르투갈어 표기인 Pirarrã에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포르투갈어의 r는 어두나 n, l, s 뒤에 오는 경우에는 ‘ㅎ’으로 적고, 그 밖의 경우에는 ‘ㄹ, 르’로 적으며 다만 rr는 ‘ㅎ, 흐’로 적게 되어있다. 이에 따라 Pirarrã에서 첫째 r는 ‘ㄹ’으로, rr는 ‘ㅎ’으로 적게 된다. 브라질 포르투갈어에서 rr는 보통 [h] 발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런 규칙이 있는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의 포르투갈어 표기 규정은 브라질 포르투갈어 발음을 많이 따른 경향이 있다. 포르투갈의 포르투갈어에서는 어두의 r와 rr를 보통 프랑스어의 r 발음과 같이 [ʁ]로 발음하는데 이를 두고 프랑스어의 r는 ‘ㄹ’로 적는데 비슷한 발음인 포르투갈어의 어두 r는 ‘ㅎ’으로 적는다는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브라질 포르투갈어에서 어두의 r를 [h]로 발음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ㅎ’으로 적도록 한 듯하다.)
문제는 ã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포르투갈어의 ãe는 ‘앙이’, ão은 ‘앙’으라고 적으라고 하고 있지만 ã 홀로 있을 때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포르투갈어에서 ã라는 철자가 a에 해당하는 비모음을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하면 ‘앙’이라고 적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니 포르투갈어의 Pirarrã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피라항’이 된다. Pirahã이란 표기는 아마 [piɾaˈhã]이라는 발음 기호에 가깝게 표기를 정한 결과 같다.
pee-da-HAN이라는 발음 설명
그렇다면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를 번역한 이는 Pirahã을 왜 ‘피다한’이라고 적었는지 생각해보자. 에버렛은 아마 일반 독자들을 위해 Pirahã의 발음에 대한 설명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에버렛은 미국인이므로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발음 설명을 했을 것이다.
[piɾaˈhã]의 [ɾ]는 치경 탄음으로 영어의 r, 즉 [ɹ] 또는 [ɻ]와는 다른 음이다. 오히려 미국식 영어의 water [ˈwɑɾɚ], ladder [ˈlæɾɚ]의 발음에서 비슷한 음을 찾을 수 있다. 미국식 발음의 흔히 말하는 굴리는 음을 흉내낼 때 water를 ‘와러’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한국어의 ‘ㄹ’은 받침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ɾ]로 발음된다.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의 r도 어중에서 보통 [ɾ]로 발음된다.아무래도 에버렛은 Pirahã의 r를 ladder와 같은 일부 단어의 ‘굴리는’ d와 비슷하게 발음하라고 설명한 것을 번역자가 [d] 발음으로 설명한 것으로 오해하여 ‘ㄷ’으로 적은 듯하다.
영어도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비모음이 없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비모음을 보통 ‘ㅇ’ 받침으로 흉내내는 한편 영어에서는 n으로 흉내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에버렛이 n과 비슷한 음으로 설명한 것을 따라 번역자도 ‘ㄴ’ 받침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한국어판에는 〈피다한 말의 한글표기와 한국어 번역 일러두기〉가 실려있다고 하니 혹시 그 내용을 알려주실 독자 분이 있다면 고맙겠다.
추가내용: 이 글을 처음 올린 후 Don’t Sleep, There are Snakes에 대한 《타임》지의 서평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서는 Pirahã의 발음을 pee-da-HAN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에버렛의 발음 설명을 따랐을 것이다.